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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Mar 28. 2017

[소설] 내려놓음 104 신호등, 켜지다.Ⅱ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104 신호등, 켜지다.Ⅱ





 언제부터인가 힘든 일이 있거나, 생각이 번잡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으면 적는 버릇이 생겼다. 그것도 아무렇게나 적지 않고 신문기사나 칼럼을 쓰듯이 제반 상황과 흐름, 그때 떠올랐던 생각들을 모두 적었는데 아마 본과 3학년 때부터 시작한 블로그 관리가 계기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블로그 관리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쏟아지는 바이럴 마케팅 업체와 그 홍보 시장을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한 포털 사이트의 알력 다툼은 매우 치열했다. 기존의 것을 조금이라도 답습하거나 참조한 흔적이 보이는 글은 검색에서 배제되기 일쑤였고, 저품질 포스팅이 많은 블로그는 경고를 먹거나 아예 경고도 없이 검색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리고 매일 글을 올리지 않고 하루라도 건너뛰면 다른 블로거에게 추월당하기에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취미 생활로 시작한 것이었건만, 내 글을 나를 모르는 누군가가 검색해서 찾아와 읽는다는 것이 신기했고 거기에서 기쁨을 느껴버린 것이 문제였다. 한의학에 대한 오해를 풀고 싶다는 사명감은 그 마음에 불을 붙였다. 그렇기에 매일 새로운 글을 창작해야만 했고 그 때부터 주위를, 일상생활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평상시와 조금은 다른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보고 적어두곤 했다.


 이처럼 기록 모드에 돌입하게 되면 블로그에 올린 글감들이 며칠 분 생긴다는 것 이외에도 많은 장점이 있었다. 당황하거나 흥분하는 등 감정적인 상태에 놓여 그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해결의 실마리나 사고의 빈 연결고리를 차근차근 적다가 알아내는 경우가 종종 있어 큰 도움이 되었고, 정신적이나 육체적으로 힘든 일에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이걸 적음으로써 작금의 이 사태들이 내가 아닌 제3자에게 벌어지는 취재거리로 느껴지게끔 만들어 멘탈 관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공보의가 되기 위해 4주 간 훈련받을 때와 지금 뇌종양 발병 사건의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심지어 상황이 힘들면 힘들수록 이를 어떻게 적어야 다른 사람에게 더 생생하게 전달될까, 공감을 이끌어낼까 고민을 하게 될 정도로, 고난과 나를 분리시키는 데에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특종을 위해 전쟁터로 향하는 종군기자처럼 환희에 불타 펜대를 놀리다 보면 감정도 조금 해소되는 것이,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런 방향으로 심리치료기법을 배워 환자들에게 활용해보겠다는 구상을 하기도 했었다.


 한 번 적기 시작하자 확실히 시간이 빨리 흘렀다. 받침대 없이 허벅지에 받쳐 휘갈기느라 글씨가 그야말로 미친년 널뛰듯 날아다녀 나중에 알아볼 수 있을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 긴 시간을 채운 것만으로도 그 역할은 충분했다.

 누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열심히 무언가를 쓰면서 마음을 달래는 자식과, 간절히 기도하며 아들의 좋은 경과를 바라는 아내를 말없이 지켜보고만 계시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어깨도 두드리며 말씀하셨다.


가자. 간호사가 불렀어.


 벌떡 일어섰다. 굵다란 허벅지 위에 놓여져 있던 필기구와 메모지들이 쏟아져 내렸다. 대충 가방 안으로 우겨넣으며 황급히 진료실로 들어갔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교수님의 얼굴 표정부터 살폈다. 그의 얼굴에 보이는 미묘한 미소. 아무런 정보도 찾을 수 없었다. 잠깐 신음소리를 흘리며 입을 여는 모습이 슬로비디오 마냥 느렸다.

 ‘의사란, 원래 그래야만 하는 존재일까?’


결과가 매우 좋네요.
사이즈도 많이 줄었고, 뇌부종 문제도 많이 해결되었어요.
이대로만 치료가 진행되면 별 문제 없을 겁니다.
얼마나 많이 걱정했는지 몰라요.
교수님은 방사선 치료 결과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데, 방사선 종양학과 선생님은 추가 방사선 치료는 없다고 하지, 저번에는 또 병무청에서 찍은 MRI 영상을 보고는 표정이 살짝 굳어져서 오늘 교수님 면담 끝나고 자기한테도 한 번 들렸다가달라고 하고...
여튼 얼마나 쫄렸는지 몰라요.
걱정 안 하는 게 이상하지 머.
다들 그래요.
 영상 보면 알겠지만 여기 하얗게 보이는 부분이 많이 없죠?
병무청 사진보다도 훨씬 줄었네요?
방사선 치료 끝나고 붓기가 가라앉아서 그런 건가?
확실히 ‘그렇다.’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저는 그렇다고 봐요.
조영 증강된 영상 한 번만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보자~


 MRI영상을 정수리에서 목 부근까지 위아래로 이동시키며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말씀을 이어나가셨다.


이게 저번에 찍었던 영상이랑 레벨이 조금씩 어긋나기는 한데,
그래도 보시다시피 육안으로도 많이 차이가 나죠?
네. 다행이네요.
정말 살 것 같다.
눈물이 다 나오려고 하네요.


레벨(level) : 높이. MRI는 대개 높이를 일정 간격으로 나누어 촬영한다.



 ‘좋은 경과.’


 주황빛 운명의 신호등은 푸른빛을 감추고 있었다. 이 청신호를 얼마나 조마조마하게 기다렸던가. 말라가던 내 마음에 봄비가 내린다. 살짝 뿌릴 것만 같던 비는 소나기였다. 결국 둑을 넘기고 말았다.


교수님 덕택에 저희가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모든 게 다 꿈만 같고 기적 같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희야 원래 할 일을 한 거고, 이런 결과는 다 동완이가 한 거죠.
동완이가 많이 수고했습니다.


 눈물을 참느라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대신하여 어머니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사이, 울먹거리는 스스로가 너무나 쪽팔려 먼저 밖으로 나와 버리고 말았다. 그놈의 자존심은 왜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것일까. 부모님은 아직 할 말이 남으셨는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나오셨다. 그리고 방사선 종양학과 선생님이 있는 스텔라관 지하 1층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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