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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un 24. 2019

임진왜란에서 가장 안타까운 패배는?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빠른 시간에 끝날 수 있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세 번의 전투로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많은 이들이 죽고 다쳐야 했다. 7년 동안 전쟁을 끌고 간 세 번의 전투가 한산도 대첩, 벽제관 전투, 명량 대첩이다. 이순신 장군이 승리로 이끈 한산도 대첩과 명량 대첩은 우리가 승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면, 벽제관 전투는 우리에게 최악의 결과를 가져온 전투였다.


1592년 4월 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은 고니시가 부산에 상륙하자, 조선은 변변한 저항을 하지 못했다. 정발과 송상현처럼 왜군을 맞아 끝까지 싸웠던 충신도 있었지만, 원균처럼 무기를 버리고 제 목숨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관료와 양반들이 더 많았다. 더욱이 훈구파의 오랜 폭정으로 경제와 사회 시스템이 무너진 상황에서 왜군을 맞아 싸울 군대가 조선에 없었다. 

왜는 신립 장군이 이끄는 조선의 군대를 충주 탄금대에서 크게 격파하고, 18일 만에 서울을 함락하였다. 선조는 이 과정에서 백성과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는 데에만 급급하였다. 개성에서 평양 그리고 의주까지 도망치면서 선조가 한 것이라곤, 백성을 버리지 않겠다는 거짓말뿐이었다. 물론 명나라에 원조를 요청하기는 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왜군을 상대로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조선과 왜가 한 편이 되어 명을 치러 온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명의 판단을 바꾼 것이 이순이 장군과 의병의 승리였다. 이순신 장군이 왜를 맞아 옥포·당포·율포 해전을 비롯한 한산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왜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이 왜를 상대로 끝까지 항전하는 모습을 확인한 명나라는 조선이 왜의 침략을 받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왜군이 명나라 땅에 들어오기 전에 조선에서 전쟁을 치루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랴오양 부청병 조승훈에게 오천 명을 조선에 파병하였다. 그러나 명군은 왜군을 상대로 크게 패하고 말았다. 

왜군의 무서운 전투력에 놀란 명나라는 이여송을 동정제독으로 삼아 4만 3천명의 대규모 군대를 조선에 파병하였다. 조선의 추위와 보급의 어려움으로 굶주리던 왜군은 조·명 연합군의 공격에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평양성에서 후퇴했다. 이때 왜군 1만 여 명이 사살하는 큰 승리를 거둔 조·명 연합군은 전쟁을 곧 끝낼 수 있다는 생각에 크게 들떠있었다. 


특히 이여송은 평양선 전투를 통해 왜군을 우습게 보았다. 조선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탈환하겠다며 명군이 자랑하는 주력군인 포병 없이 기마병만으로 내려갔다. 당시 왜군은 5만에 달하는 숫자가 서울에 집결하고 있었다. 이들 중 적극적인 공세를 주장하는 고바야가와가 4만의 왜군이 벽제관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숫돌고개라 불리는 여석령에 진지를 구축하고 명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은 승리의 도취감에 척후병도 보내지 않고 무리하게 남하하다가 3대로 나누어 공격하는 왜군에게 큰 패배를 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여송은 이유승의 희생으로 간신히 전장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부총병이었던 양원이 이끄는 화군(火軍)의 도움으로 왜군을 헤음령에서 막아낼 수 있었다. 이후 명군은 파주를 거쳐 개성으로 물러나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의 도원수였던 김명원은 이여송의 명령에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 덕택에 조선군은 군세를 유지하면서 왜군의 진격을 견제할 수 있었다. 또한 명군과 함께 서울을 탈환하려다 행주산성에 고립된 삼도제찰사 권율 장군이 우키다가 이끄는 3만의 왜군을 맞아 승리를 거두면서 패배로 기울어질 뻔한 전세를 뒤집어 버렸다. 


명군이 크게 패한 벽제관 전투(또는 여석령 전투)와 행주산성에서 왜군에 승리한 해가 1593년 초다. 이후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은 일본과의 싸움을 회피하며 조선에 무리한 요구만을 일삼았다. 또한 왜와의 휴전협정을 통해 조선의 8도 가운데 4도를 넘겨주려하였다. 만약 이여송이 좀 더 신중하게 조선의 조언을 제대로 들었다면 임진왜란은 큰 피해를 낳지않고 1년도 안되어 끝났을지 모른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힘이 있어 명군과 대등한 입장이었다면 왜군을 상대로 확실한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다. 명군의 잘못만은 아니지만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이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한 결과 7년 동안 수많은 백성이 희생된 사실이 안타깝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7년 동안 치루어진 것은 명군의 책임이 아니다. 바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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