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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Aug 24. 2019

왕의 이름은 몇 개?

김포 장릉에 추존된 인조의 아버지 원종


우리는 조선시대의 왕을 태조, 세종 등의 호칭으로 부른다. 그러나 이 호칭은 조선 시대의 왕들은 살아생전 들어본 적이 없다. 만약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한 어느 농부가 왕의 행차를 보게 되었다고 하자. 왕의 행차를 보게 되었다는 사실에 매우 흥분하며 옆에 있는 사람에게 왕의 이름을 물어보는 순간, 그 질문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깨닫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포졸들이 농부에게 다가와 왕을 이름을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잡아들여 매질을 하고 옥에 가둘 것이기 때문이다. 왜 왕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일까?


사실 왕들은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이름을 들어볼 일이 없다. 왕의 이름은 어느 것보다도 존엄했기에 어느 누구도 감히 왕의 본명을 글로 써서도 입으로 발음해서도 안 되었다.(왕의 본명을 휘(諱)라고 한다.) 만약 신료들과 백성들 어느 누구라도 왕의 본명을 말하거나 글자로 쓸 경우 귀양을 가는 등 심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예를 들어 연산군은 유생이 자신의 이름과 같은 글자를 발음했다고 해서 귀양을 보냈고, 영조는 승지가 상소문을 읽다가 영조의 이름과 발음이 같은 글자에 우물주물하자 특별히 글자를 읽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기도 했다.


이처럼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도 쓰지도 못하게 하다 보니, 신료와 백성들은 일상생활에 큰 불편함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왕들은 가급적 자신의 이름을 외자로 만들었고, 발음이 어렵거나 잘 쓰이지 않는 한자로 이름을 지어 백성들의 불편함을 덜어주려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왕들의 보여준 애민정신이었다.

세조가 누워있는 광릉

물론 조선시대 27명의 왕이 모두 이 원칙을 따른 것은 아니다. 조선 초기에는 이 원칙이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 태종과 단종의 경우 이름이 두자였다. 태종의 이름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이방원’이고, 단종의 이름은 ‘이홍위’다. 태종과 단종과는 달리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스스로 개명한 태조와 정종도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이단’으로, 정종 ‘이방과’는 ‘이경’으로 개명하여 건국 초의 민심을 얻고자 했다. 물론 조선의 모든 왕들은 즉위 후 자신의 이름을 들을 수 없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왕은 살아서 이름이 외자였지만, 죽으면 엄청나게 긴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 이유가 묘호와 시호 때문이다. 묘호(廟號)란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붙이는 이름으로,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왕의 호칭이다. 태조, 정종, 태종, 세종이 바로 묘호인 것이다. 그리고 묘호 뒤에는 살아생전의 왕의 업적을 평가하고 공덕을 칭송하는 시호(諡號)를 붙였다. 그런데 여기가 끝이 아니다. 신료들이 왕의 업적을 찬양하는 이름을 뒤에 또 붙였는데, 이를 존호(尊號)라고 한다.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무덤인 유릉

태조의 경우 사후 ‘태조 강헌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太祖 康獻 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 는 호칭을 얻었다. ‘태조’는 신위를 모실 때 사용되는 묘호이며, ‘강헌’은 왕이 살아 있을 때 세운 업적을 칭송한 시호다. 그리고 ‘지인계운성문신무’는 신료들이 왕의 업적을 찬양한 존호인 것이다. 그렇다보니 왕의 죽고 난 다음에 붙인 이름은 묘호(2자)와 시호(2자) 그리고 존호(8자)를 합쳐 총 12자가 된다. 한두 명 정도라면 왕의 이름을 외울 수 있겠지만, 27명의 왕의 이름을 다 외우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조선 시대의 왕을 호칭할 때 묘호를 사용하고 있다.


지금은 현재의 삶을 바꿔보기 위해 개명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조선의 왕은 현재의 삶보다는 자신의 삶에 대한 후대의 평가를 더 중요시하였다. 굳이 왕이 아니더라도 옛말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탓하기보다는 자신의 이름에 책임질 수 있는 삶을 살았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왕의 이름을 통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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