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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Sep 03. 2019

조(祖)와 종(宗)의 구별법은?

왕의 복장을 재현한 인형

우리는 조선의 왕을 호칭할 때 태조, 세종과 같이 묘호를 사용한다. 그런데 어떤 왕에게는 조를 붙이고 어떤 왕에게는 종을 붙이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종보다는 조가 더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둘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세종은 영토를 넓히고 많은 업적을 세웠음에도 종을 붙이고, 19세기 세도정치 기간에 큰 업적을 세우지 못한 순조는 조를 붙인다. 그렇기에 우리는 조와 종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조선은 27명의 왕이 있었다. 이중 조(祖)를 사용한 왕은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7명이다. 이들은 어떻게 조를 얻게 되었을까? 보통 조는 나라를 세웠거나 반정에 성공한 왕에게 붙인다. 또한 국난을 극복한 왕에게도 사용된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했고, 세조는 반정을 통해 왕위를 지켰기에 조를 붙인다.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란을 이겨냈다는 업적으로 조를 붙였다. 인조는 광해군을 내쫓고 왕위에 올랐으며, 병자호란을 이겨낸 공로를 조를 받았다.

왕의 신위가 모셔진 종묘

하지만 연산군을 내쫓고 왕이 된 중종은 왜 조를 사용하지 못했을까? 중종의 경우 중조로 묘호를 붙이려했으나 성종의 직계라는 사실이 왕권에 더 도움이 된다고 여겼기에 원칙을 따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영조와 정조 그리고 순조는 무슨 기준으로 조를 사용했을까? 사실 영조와 정조 그리고 순조는 조선 후기에 종보다 조가 좋다는 인식으로 종을 사용하다가 조로 바뀌었다. 철종이 순종을 순조로, 고종이 영종과 정종을 영조와 정조로 바꾸었다.


조가 종보다 좋다는 인식이 생긴 것은 광해군이 통치하던 시절이다.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는 조선 시대 최초로 서자로 왕이 된 인물이다. 종(宗)이 선왕의 적자로서 왕위를 계승했을 때 사용한다는 기준에 부합되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임진왜란 당시 왕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에 국난 극복이라는 명분도 약했다. 광해군 자신도 서자로서 왕권에 대한 도전을 경계하며 두려워했다. 자신이 왕위 계승자라는 정통성을 갖기 위해 아버지인 선조의 묘호를 높여야만 했다. 그래서 선종이라 붙여질 묘호는 선조로 불리게 되었다.

신위에 붙여지는 이름이 묘호

이후 조선 후기 힘이 약했던 왕들은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조를 사용했다. 또한 적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인물이 적었던 것도 조를 붙일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했다. 특히 19세기 왕권이 매우 미약했고 적자가 아니었던 철종과 고종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해 많은 고심을 했다. 그에 대한 해답으로 영조와 정조 그리고 순조의 격을 높임으로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18명의 왕은 적자로서 덕을 가지고 백성을 자식처럼 아끼고 보살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종으로 불린다. 하지만 연산군과 광해군은 단종으로 복위된 노산군과는 다르게 조와 종 모두를 얻지 못했다. 이는 연산군과 광해군이 조선을 통치하기는 했으나 실정과 악행으로 쫓겨나, 이후의 왕과 신하들에게 왕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 까닭이다. 단, 왕의 후궁에게서 얻은 왕자라는 사실만은 인정받았다. 조선은 중전에게서 얻은 자식을 대군(大君), 후궁에게서 얻은 자식은 군(君)이라 불렀다.


지금도 이름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개명한다. 사실 이름이 운명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름이 대인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부르기 편하고 예쁜 이름은 심리적 안정을 주지만, 발음이 어렵고 놀림 받기 쉬운 이름은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의 성품과 행동이 이름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을까? 철종과 고종이 선왕의 묘호를 바꾸며 왕권을 강화시키려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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