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복(1712~1791)은 할아버지가 노론에 의해 울산 부사에서 파직되면서 전라도 무주에서 생활하였다. 어릴 때부터 병이 많았던 안정복은 어려운 집안 여건으로 10세가 되어야 겨우 <소학>을 배울 수 있었다.
1735년(영조11년) 할아버지가 죽으면서 경기도 광주 경안면 덕곡리로 거처를 옮긴 안정복은 음양‧의약 등 기술학과 손자‧오자 등의 병서, 불교와 도교 등 다양한 학문을 공부했다. 여러 학문을 익힌 만큼 많은 책을 편찬하였다. 26살에 <치통>, <도통>을 저술하고, 29살에는 고전에 관한 연구서인 <하학지남> 상‧하권을, 31살에는 여성의 행동 규범에 관한 <여범>을 편찬하였다.
실학의 큰 스승이던 성호 이익을 만나면서 큰 깨달음을 얻은 안정복은 자신이 깨달은 바를 실천하고자 38살이라는 늦은 나이로 관직에 나갔다. 강화도 만령전의 참봉으로 처음 관직에 나간 안정복은 의영고봉사‧사헌부감찰을 역임했으나 아버지의 죽음과 자신의 건강 악화로 5년 만에 벼슬을 그만두어야 했다. 이후 18년 동안 <임관정요>, <동사강목> 등 저술에 몰두하던 안정복은 많은 사람의 추천으로 61살이 되던 해에 세손이던 정조를 가르쳤다. 정조가 즉위한 이후에는 충청도 목청 현감과 돈녕부주부 등을 역임하다가 다시 고향에 돌아와 학문 연구에 힘썼다. 79세에 종2품의 가선대부로 품계가 오른 안정복은 1791년(정조15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801년(순조1년) 신유박해로 많은 천주교도가 죽어갈 때도, 노론 벽파는 안정복의 천주교 비판을 높이 평가하여, 정2품의 자헌대부로 추증하였다.
안정복은 이익의 제자였던 권철신이 천주교에 옹호적으로 나왔던 것과는 달리 <천학고>와 <천학문답>이라는 책을 통해 천주교를 비판하였다. 특히 이익 제자들의 천주교 입교를 막았는데, 그중에서도 자신의 제자이며 사돈지간인 권철신과 동생 권일신에게 천주교를 멀리하라는 편지를 보내며 적극 말렸다. 무엇보다도 안정복의 가장 대표적인 저술인 <동사강목>은 22년간 광범위한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고 고증하여 만들었으며, 단군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자주적인 관점에서 편찬하였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