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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Feb 22. 2022

처處의 사용을 금하다




환관 김처선(?~1505년)은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7명의 왕을 모셨다. 계유정난이 일어날 무렵 유배지에서 석방되어 궁으로 돌아온 김처선은 1460년(세조 6년)에 원종공신 3등에 임명될 정도로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성종 때도 그는 왕명을 전달하는 승전색을 맡아 말과 마장을 하사받는 등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또한 종2품 최고직인 상선으로 궁중 내 음식을 총괄하며 선농제에 참여하는 활발한 활동으로 정2품 자헌대부까지 올랐다. 김처선에 대한 믿음이 컸던 성종은 자신을 대신해 김처선에게 고위 관료에게 말과 선물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길 정도였다.

연산군 때도 이러한 총애는 이어졌다. 연산군은 김처선을 시릉내시로 임명해 시묘살이를 맡길 정도로 믿고 따랐다. 그러나 연산군이 사화를 통해 많은 이를 죽이고, 여자와 유흥에 빠져 폭정을 일삼자 둘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1504년(연산군 10년),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임금이 먹을 음식을 감독하던 김처선은 무례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하옥되어 처벌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연산군에게 죽었다.



실록에 의하면 관료들도 연산군의 눈치를 살피며 충언을 하지 않던 때에 김처선은 충언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연산군은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는 김처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그가 자신을 돌봐주던 순간이 떠올라 벌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연산군이 처용 놀이 도중 음란한 짓을 하자, 김처선은 “늙은 놈이 네 분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통하지마는 고금에 전하처럼 행동하는 이는 없었습니다.”라며 연산군에게 충언을 올렸다.

화가 난 연산군이 활을 쏘아 김처선의 갈빗대를 맞추자 김처선은 “조정의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오래도록 보위에 계시지 못할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라며 충언을 멈추지 않았다. 더욱 화가 난 연산군이 연이어 다리에 화살을 쏘고 일어나라고 명령하자, 김처선은 “전하라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라며 부당한 지시를 거부했다.





이 처참한 광경을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끝내 연산군은 김처선의 혀를 자르고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내 그를 죽였다. 시체는 호랑이의 먹잇감으로 주고, 김처선의 양아들과 7촌 이내 친척을 모두 죽였다. 또한 모든 백성에게 처(處)를 사용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처용무’도 ‘처’가 들어간다며 ‘풍두무’로 부르게 하고, 이름에 처가 들어간 자는 모두 개명하게 했다. 충언하다 억울하게 죽은 김처선은 1751년(영조 27년)이 되어서야 고향에 충신을 알리는 붉은 문인 정문이 세워지면서 명예가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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