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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Mar 01. 2022

120년 전 대한제국과 우크라이나의 차이




출처: 연합뉴스

러시아의 침략으로 우크라이나는 큰 고통을 겪고 있다. 전쟁이 일어난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제시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자국의 영토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가장 큰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882년에 건국된 키예프 공국부터 20세기 소비에트연방의 일원이었던 우크라이나는 오랜 시간을 러시아로 지냈다. 그렇기에 언어와 종교 등 사회문화적으로 러시아와 공통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는 분명 다른 문화와 인종의 차이점으로 1991년 소비에트연방에서 독립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보다 국력이 강한 러시아가 이를 완전히 인정하지 않았다. 소비에트연방이 무너질 무렵 어쩔 수 없이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바라보았을 뿐, 속으로는 여전히 러시아의 한 지방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크라이나는 언제든 러시아가 움직일 수 있는 위성국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협조적이지 않은 나토에 가입하려고 하자, 러시아 내에서 불만과 위기감이 제기되었다. 물론 여기에 러시아 내부에서 인기가 떨어지고 있는 푸틴의 조바심도 한몫했다. 푸틴은 자신에 대한 반대 움직임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침공을 실행했다. 물론 이 외에도 다양한 이유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





러시아가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에 미사일을 쏘며 군대를 진격하자, 많은 외신은 우크라이나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붕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흐르고 있다.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으로 무능력하다고 비판받던 젤렌스키는 망명을 도와주겠다는 미국의 제안을 거절하고 수도 키예프에 머물고 있다. 방송을 통해 국민을 위로하고 전쟁에 승리할 수 있다며 독려하고 있다. 또한 서방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에게 우크라이나를 도와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러시아와의 협상테이블에 나가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민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달려가고 있다. 80세 노인이 아직 싸울 수 있다며 총을 잡았고, 복서 3체급 챔피언에 올랐던 스포츠 영웅 로마첸코가 군복을 입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양조장은 술 대신 화염병을 만들고, 거리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러시아군을 진입을 막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고 있다. 우크라이나 밖에서는 우크라이나 펜싱 대표팀이 러시아와의 경기를 앞두고 기권을 선언하면서 ‘전쟁을 멈추고 우크라이나를 구하자.’라는 종이를 들었다. 전장으로 떠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과 헤어질 수 없어 눈물을 떨구는 영상처럼 많은 우크라이나 국민은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나라를 지키고자 한다.

이들의 포기하지 않는 정신으로 나라를 지키려는 모습은 우리를 비롯한 세계인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그 결과 세계 각국이 그들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그렇기에 분명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승리할 것이다. 또한 이를 계기로 우크라이나에서 친러세력이 힘을 잃을 것이다. 비록 전쟁의 아픔은 남겠지만, 미래의 우크라이나는 과거보다 더욱 자주적인 나라로 성장할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물론 일부에서는 러시아와 대한민국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북한에 대한 위협이 증가하고, 자동차 등 경제 분야에 닥칠 타격을 우려한다. 틀린 주장은 아니다. 하지만, 120여 년 전 우리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우크라이나의 현 상황을 제3장의 입장에서 관망해서는 안 된다.

1905년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기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독일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 밀서를 보냈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동시에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장해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밀서는 황제 등 국가 수반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더러 전달되었어도 곧바로 무시되어 한편으로 치워졌다.

왜 그랬을까? 열강들은 대한제국을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국가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에게 대한제국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먹잇감을 차지하기 위해 일본에게 던져주는 작은 먹잇감에 불과한 존재였다. 즉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절대로 대한제국을 도와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또한 대한제국 스스로도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자신을 침략하는 일본·러시아·청나라에 맞서기보다는 오히려 나라를 갖다 바치려는 국민으로 가득 찬 나라로 보였다.





당연히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민 스스로 나라를 지킬 생각이 보이지 않는 대한제국을 도와주려는 나라는 없었다. 그나마 러·일전쟁의 패배에 대한 복수로 헤이그 특사를 지원하겠다는 러시아마저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태도를 바꾸었다. 그리고 불과 몇 년 뒤,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경술국치를 겪었다. 이후 일제의 수탈과 억압을 견디지 못한 우리는 1919년 3·1만세 운동으로 전 세계에 우리의 독립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로써 한국인들이 나라를 되찾고 싶어 하는 열망의 씨앗을 뿌릴 수 있었다.

2022년 3·1절은 좀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120여 년 전 우리의 모습과 달리 나라를 지키고자 하나로 똘똘 뭉쳐 싸우는 우크라이나가 꼭 승리하기를 바라게 된다. 그래서 우크라이나에서는 우리의 3·1운동이 일어날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지금 우리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도와주는 행동을 부정하거나 비난하지 않아야 한다. 우크라이나 지지와 원조는 6·25전쟁 당시 세계로부터 받은 도움을 되갚는 일이며, 미래 대한민국을 위한 보험이 될 것이다. 특히 잘못을 바로잡아 옳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의로운 대한민국이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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