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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Aug 30. 2022

신라 왕 명칭 변화 배경

분황사 모전석탑

신라는 왕에 대한 호칭 이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되었다. 박혁거세는 거서간(居西干)이라는 호칭을 사용했고, 두 번째 왕인 남해는 차차웅(次次雄)이라 불렸다. 세 번째 왕인 유리(儒理)부터 16대 흘해까지는 이사금(尼師今)을 사용하였다. 광개토대왕의 도움으로 국난을 극복했던 제17대 내물왕은 마립간(麻立干)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김씨의 왕위 독점을 끌어냈다. 그리고 중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지증왕 이후로 왕(王)이라는 호칭을 계속 사용하였다. 왜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달리 지배자를 뜻하는 호칭이 여러 개였을까?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를 거서간으로 부른 데에는 철기 문화를 가진 이민족이 경주의 토착 세력을 누르고 나라를 세웠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거서간은 진한(辰韓)의 말로 ‘귀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박혁거세의 이름도 풀이해보면 ‘알에서 나와 널리 세상을 비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박혁거세로 대변되는 새로운 이민족이 사로국(斯盧國)을 세우면서 풍요로운 세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두 번째 호칭인 차차웅은 ‘무당’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신격화된 박혁거세를 계승한 남해왕이 백성과 관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호칭이다. 남해왕이 무당으로서 박혁거세를 위한 제사를 주관함으로써, 사로국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존재로 주목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세 번째 호칭인 이사금을 처음 사용한 유리왕은 석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다가 이가 많은 사람이 현명하다는 말에 신라의 제3대 왕으로 오른 인물이었다. 석탈해 설화는 박혁거세 후손에 버금갈 만한 새로운 무리가 신라 사회에 유입되었음을 보여준다. 서로 대등한 세력이 왕위를 번갈아 차지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존중해주는 문화가 밑바닥에 깔려있지 않으면 어렵다. 현명한 자가 왕위에 오른다는 명분이 있어야 서로 간의 갈등을 막을 수 있었다. 이사금은 서로의 세력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오랫동안 신라 지배자의 호칭이 되었다.      


대군장이란 뜻을 가진 마립간은 고구려의 도움으로 가야를 누르고 안정을 되찾게 된 내물왕부터 사용된 호칭이다. 광개토대왕은 왜의 침략에 고전하던 신라를 구원해준 대가로 신라에 많은 내정간섭을 하였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내물왕의 후손들인 김씨가 계속 왕을 하는 것이 신라를 관리하기에 편했다. 신라 내물왕의 입장에서도 이 기회에 왕위를 박씨나 석씨와 공유하지 않고 독점하고 싶었다. 광개토대왕과 내물왕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신라는 이후 김씨가 박씨·석씨보다 우월하다는 뜻을 가진 대군장이라는 마립간을 사용하였다.      

감은사지


내물왕 이후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국력 향상이 필요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의 선진 문물 수용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지증왕은 기존의 모습에서 탈바꿈하여 새로운 나라가 되겠다는 의미로 나라 이름을 신라(新羅)로 바꾸고, 중국식 호칭인 왕을 사용하였다. 중국 문물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신라는 중앙집권 국가로서 빠른 성장을 하게 되었고, 훗날 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이처럼 신라 지배자의 호칭이 여러 번 바뀌게 된 것은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여러 계통 간의 대결과 협력 그리고 중국의 선진 문물을 늦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지리적 위치가 가져온 결과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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