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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Sep 06. 2022

1952~65년까지의 한일회담 과정

1952~65년까지의 한일회담 과정

과거 청산을 시작으로 새로운 한일관계 수립을 위한 첫 출발은 6·25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1년에 시작되었습니다. 예비회담(1951.10~1952.2)이라고 불리는 이 기간 한국과 일본 대표가 도쿄에서 만나게 된 것은 미국 주도로 이루어졌습니다. 6·25전쟁에서 한미일의 공조가 튼튼해야 했던 만큼 미국은 도쿄에서 한일 양국 대표 만남을 적극 주선했습니다. 그러나 크게 두 가지 쟁점에서 이견조율이 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는 재일한국인에게 영주권을 부여하여 일본인과 동등한 법적 지위를 보장하는 문제였고, 두 번째는 지금 설정되어 있는 영해 12해리보다 더 넓은 바다를 우리의 영토로 주장하는 ‘대한민국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이승만라인 또는 평화선)’이었습니다. 두 가지 모두 인정하지 않는 일본으로 인해 협상에서 어떤 결론도 나지 않습니다. 


제1차 회담(1952.2~4)은 일본이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내세웠기에 어떤 결론도 나오지 못했습니다. 회담에서 다양한 논제가 거론되었는데 그중에서 일본이 한국에 남겨놓은 재산을 돌려달라는 요구와 ‘1910년 8월 22일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이 무효’라는 문구가 일본인의 감정을 자극하니 삭제하자는 억지 주장을 이승만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회담이 결렬되고 맙니다. 


제2차 회담(1953.4~7)에서는 한일회담을 열게 해달라는 일본 정부의 요청을 받은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과 머피 주일미국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을 도쿄로 초청하여 요시다 시게루 수상과 만남을 주선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의 사죄를 요구했지만, 일본 수상은 과거 잘못은 군벌이 저지른 일이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안보를 위해 공산주의에 맞서기 위한 한일 양국의 우호 관계를 맺자고 했습니다. 더욱이 1차 회담과 변함없이 한국에 남겨놓은 재산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면서 이승만라인 철폐를 주장하는 뻔뻔한 일본의 태도로 어떤 성과와 결과물도 도출되지 못합니다.


제3차 회담(1953.10)에서는 일본 대표 구보타가 ‘일본 통치가 한국에게 도움이 되었으며, 미군정이 일본 재산을 한국에 넘겨준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라는 망언을 남발하며 기존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 자리에서도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일관되게 보여주었습니다. 


제4차 회담(1958.4~1960.4)은 일본 기시 노부스케 정부가 한국에 대한 재산청구권을 포기하고, 구보타 발언을 철회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회담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어업과 청구권 문제에 대해서는 과거의 주장만 되풀이하며 어떤 입장의 변화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일본 정부가 재일 한인의 북송을 추진하는 동시에 오무라수용소에 갇힌 북한 귀환 희망자를 가석방하면서 어느 한 가지도 협상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회담이 무산된 가장 큰 원인은 4·19의거로 인한 이승만 정부의 붕괴였습니다.


제5차 회담(1960.1~1961.5)은 장면 정부와 일본의 이케다 정부 사이에서 진행이 되었습니다. 장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한일회담에 나선 것과는 달리 일본 정부는 예전과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며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결국 어떤 성과도 얻지 못하고 있는 도중 5·16 군사 정변으로 회담은 중단되게 됩니다. 

제6차 회담(1961.10~64.4)은 한·미·일 모두 정권이 바뀐 상황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미국은 동북아시아를 사회주의 국가로부터 지키기 위해 체결한 미·일신안보조약을 보완하기 위해 한일수교를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일본도 부산 적기론을 내세우며 안보 위기를 극복하는 동시에 한국에 자본을 투입하는 등 경제 진출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고자 했습니다. 대한민국도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한 만큼 미국으로부터 권력을 보장받고, 일본 돈으로 경제성장을 이루어 국민의 지지를 끌어내어 정권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삼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상황에서 박정희 의장은 1961년 11월 도쿄에서 이케다 수상과 정상회담을 갖고 한일회담을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박정희 의장은 자신이 다녔던 만주군관학교 교장을 상관으로 모시는 듯한 행동으로 일본에게 굴욕적인 자세를 취했다는 비판을 받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제6차 회담이 기존 회담과 달라진 것은 일본에 요구하던 청구권 대신 경제협력 방안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1962년에는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일본 외무대신 오히라 마사요시를 만나 무상원조 3억 달러, 유상원조 2억 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 이상으로 한다는 ‘김종필·오하라 메모’가 알려지면서 한일회담에 대한 엄청난 비판과 저항이 이어지게 됩니다. 

박정희 정부는 김종필을 공화당 의장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등의 제스처로 국민의 반발과 저항을 무마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의사를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고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며 한일회담을 추진한 결과 6·3항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서울에서만 18개 대학 15,000여 명의 학생이 가두시위를 벌이자, 박정희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학생과 시민들을 탄압하였습니다.                     


제7차 회담(1964.12~1965.6)은 시민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리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일본 대표 다카스기 신이치가 ‘일본은 조선을 낫게 하려고 식민지로 지배했다. 일본의 노력은 결국 전쟁으로 좌절되었지만, 조선을 20년 정도 더 가지고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라고 망언을 했음에도 1965년 2월 20일 서울에서 한일 기본관계 조약을 가조인합니다. 4월 3일에는 도쿄에서 청구권과 경제협력, 어업, 재일 한인의 법적 지위 등이 가조인되었고, 최종적으로 6월 22일 일본 수상관저에서 한일조약에 한·일 전권대표는 모두 정식 조인하게 됩니다. 효창운동장에 학생과 시민 4만여 명이 모여 한일 협정 무효를 주장하며 반대 시위를 벌였음에도 박정희 정부는 1965년 7월 14일 베트남 파병동의안과 함께 한일 협정을 국회에 발의합니다. 그리고 8월 14일 여당 단독으로 한일조약 비준 동의안을 통과시킵니다. 이에 반대 시위가 전국적으로 크게 일어나자 박정희 정부는 위수령을 발동하여 군대로 시민을 진압해버립니다. 일본도 한일 협정이 체결되면 한미일 군사 협력체제로 인해 평화가 깨질 수 있다는 반대가 있었지만 큰 무리 없이 비준 동의안을 통과시킵니다. 결국 양국 모두가 한일조약 비준 동의안을 통과시키면서 1965년 12월 18일 한일조약이 발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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