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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Nov 29. 2022

임꺽정, 민중의 희망으로 떠오르다

명종 시기에는 훈구파들의 부정 축재와 비리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말이 아니었다. 토지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유민이 되거나 백성들을 괴롭히는 도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임거정 또는 임꺽정(?~1562년)이라 불리는 백정 출신이 이끄는 도적단은 규모도 컸고, 활동 범위도 넓었다. 이들은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심지어 한양에서도 부호나 대상인을 공격해 재물을 빼앗았다.     


임꺽정의 무리에는 노비와 상민 외에도 아전과 역리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다. 덕분에 이들 무리는 많은 정보를 획득하고 공유하며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이들은 빼앗은 재물을 독차지하지 않고 빈민들에게 일부 나누어주어 자신들을 신고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임꺽정이 이끄는 도적단의 활동 범위가 날로 넓어지고 피해 규모도 커지자, 1559년(명종 14년)에 명종은 이들을 단순한 도적이 아닌 반적(叛賊), 즉 역적으로 규정하고 소탕을 명했다.     

그러나 포도관 이억근이 2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갔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하거나, 포상을 노리고 무고한 사람을 임꺽정이라 속이는 관료들이 속속 등장했다. 한 예로 황해도 순경사 이사증과 강원도 순경사 김세한이 임꺽정의 형 가도치를 죽이고 그를 임꺽정으로 속인 사건이 있었다. 의주목사 이수철은 아무 상관없는 윤희정과 윤세공을 고문해 그들을 임꺽정과 한온이라 자백하게 하고, 한 노파에게 임꺽정의 아내로 진술하라며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      


누구도 자신들을 잡을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한 임꺽정은 궁궐에서 멀지 않은 서울 장통방(종로2가)까지 활보했다. 그러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관군에 의해 아내와 부하들이 체포되면서 임꺽정의 도적단은 위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부인과 부하를 구하기 위해 참모 서림을 한양으로 보냈으나 오히려 숭례문 밖에서 서림이 체포되고, 토포사 남치근이 근거지를 압박해오자 임꺽정과 그 무리는 구월산에 갇히게 되었다.      


관군에 붙잡힌 참모 서림이 임꺽정을 배반해 토벌군을 근거지로 인도하자, 위기에 처한 임꺽정은 토벌군으로 위장해 도망치려다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실록을 쓰는 관헌은 임꺽정을 두고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해,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버린다. (중략)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라며, 이 일을 단순히 도적의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적 문제로 발생한 안타까운 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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