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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un 06. 2023

백정은 왜 형평사를 조직했을까?

조선 시대 사람 취급받지 못하던 백정들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자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백정들도 마을에 자유롭게 드나들고 자식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겠다는 꿈이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사회·제도가 변한다고 해서 의식이 바로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갑오개혁 이후에도 여전히 백정은 사람 취급받지 못하고 무시와 멸시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일제가 국권을 강탈한 뒤에도 백정의 사회적 위치와 처지는 바뀌지 않았다. 이제는 일본인들에게까지 무시를 당해야 했다. 특히 1920년대에 들어서 일제의 식민통치방식이 민족분열통치로 변화되었다. 우리 민족을 이간질하고 분열시켜 한국인이 하나로 뭉치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이었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신분 간의 갈등을 부추겼고, 그 대상 중 하나가 백정이었다.     


일제는 호적·입학원서·관공서 제출 서류에 백정의 신분을 표시하여 여러 불이익을 받게 했다. 무엇보다도 백정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자녀를 학교에 보낼 수 없는 현실이었다. 교육만이 백정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 여기던 상황에서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못한다는 것은 백정이라는 신분과 차별을 대물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당시 경상남도 진주에 뛰어난 상술과 부지런함으로 백정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엄청난 부를 축적했던 이학찬이 있었다. 돈은 많이 벌었지만, 백정에 대한 차별이 변하지 않는 현실에서 자식의 삶이 크게 걱정되었다. 자식이 백정이라는 차별을 받지 않고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학찬의 바람은 백정의 자식은 학교에 입학할 수 없다는 통보에 무너져 내렸다.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백정이라는 한계는 여전히 깨지지 않았다.      


이학찬은 백정에 대한 차별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님을 인식하고 백정들을 모아 1923년 조선 형평사를 조직하였다. 저울처럼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는 이름의 형평사는 평등한 세상을 요구한 사회운동이자 신분 차별 반대 운동이었다. 조선 형평사가 만들어지자 수많은 백정이 동참하여 그동안의 설움과 울분을 토해냈다. 조선 형평사의 활동은 지식인과 학생들에게 깊은 공감과 울림을 주면서 단순한 신분 차별 철폐 운동을 넘어서 항일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국제적 연대도 모색하여 일본에서 하층민을 차지하던 부락민 차별에 반대하며 만들어진 수평사(1922)와 정보를 교환하며 신분 해방 운동을 이끌었다. 형평사는 전국에 지사를 세우며 성장했고, 광범위한 지지 여론을 받았다. 하지만 일제는 조선 형평사의 활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선 형평사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점차 심해지자 활동이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조선 형평사는 일제의 탄압과 국내 다른 계층의 발발로 초기에 의도했던 성과를 얻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일원으로 백정이 참여하여 활동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었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본령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여, 우리도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을 기하자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지금까지 조선의 백정은 어떠한 지위와 압박을 받아 왔는가? 과거를 회상하면 종일 통곡하고도 피눈물을 금할 수 없다. (중략) 직업의 구별이 있다고 한다면, 금수의 생명을 빼앗는 자는 우리만이 아니다. 출처: 조선 형평사 설립 취지문(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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