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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Sep 05. 2023

흥선대원군의 개혁과 실패

1800년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갔어요.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세도 가문이 돈을 받고 관직을 팔자, 많은 관료가 백성과 국가가 아닌 자신의 이익만 추구했거든요. 그로 인해 백성은 고통에 신음해야 했어요. 왕과 왕실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왕도 세도가의 잘못을 바로잡을 힘이 없었어요. 그로 인해 희망이 없어진 백성들은 결국 임술농민봉기처럼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일어서야만 했어요. 그런 가운데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흥선대원군의 12살의 둘째 아들이 왕으로 즉위했어요. 이 왕이 고종이에요. 

조대비에게 수렴청정의 역할을 넘겨받은 흥선대원군은 약해진 왕권과 전통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여러 개혁을 펼쳤어요. 특히 텅텅 비어버린 재정을 채우기 위해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거짓으로 숨겨놓은 토지를 찾아내려고 노력했어요. 또한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를 시행했어요. 그래서 흥선대원군은 양반이 서원에서 공부한다는 이유로 군역을 면제받는 일이 없도록 전국의 수많은 서원을 철폐했어요. 흥선대원군이 누락된 토지를 찾아내고, 서원 철폐와 호포제를 실시하면서 조선 정부의 재정 상황이 많이 좋아지게 돼요. 당연히 백성들도 흥선대원군의 개혁을 응원했고요. 상대적 빈곤이라는 말 들어봤나요? 돈 많고 권력을 지닌 양반이 군역을 지게 되었으니 일반 백성들이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이뿐만이 아니었어요. 흥선대원군은 파행적으로 운영되는 국가 운영도 바로 잡으려 노력했어요. 안동김씨 등 세도가를 몰아내고, 그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어 있던 남인과 북인 그리고 서북 출신의 사람에게도 등용할 기회를 주었어요. 드디어 기회를 얻게 된 유능한 양반들은 적극적으로 흥선대원군을 지지하며 국정운영에 참여했어요. 그로 인해 안동김씨의 많은 이들이 정계에서 쫓겨났고, 대신 각계각층의 다양한 목소리가 국정에 반영될 수 있었어요. 흥선대원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임진왜란 이후 국가 주요 정책이 비변사를 통해 파행적으로 결정되는 관행을 바꾸고자 의정부의 기능을 강화했어요. 또한 종친부의 권한을 강화하여 외척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견제했어요. 


국방 강화에도 흥선대원군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어요. 조선 연안에 이양선이 출몰하는 상황에서 중국 청나라가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하고, 일본이 미국에 강제로 개항하는 모습은 조선에 큰 위협으로 다가왔거든요. 실제로 흥선대원군의 예상대로 러시아와 국경선을 맞닿게 되고,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략하는 병인양요가 발발해요. 흥선대원군은 기존의 군사 제도로는 서양 세력을 막기 어렵다며, 삼군부를 다시 설치하여 군사력을 강화했어요. 그 결과 미국의 강화도 침략에 맞서 조선군은 용감히 맞서 싸울 힘을 갖게 돼요. 백성의 고충을 덜어주려는 노력도 빠지지 않았어요. 백성을 가장 괴롭히던 환곡제를 폐지했어요. 대신 백성 스스로가 진휼을 목적으로 운영하는 사창제를 운영하도록 하여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개혁은 경복궁 중건으로 빛이 바래게 돼요. 국가 재정이 부족한 상황에서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경복궁 중건은 백성·관료·정부를 너무 힘들게 만들었어요. 중건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강제로 원납전을 징수하고, 당백전을 발행하여 물가를 폭등시켰거든요. 농번기에도 백성을 강제 노역시키면서 경복궁 중건은 모두에게 불만을 주었어요. 더 나아가 흥선대원군이 추진한 개혁의 목적이 어디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돼요. 결국 1873년 최익현이 고종의 친정을 요구하면서, 대원군은 권력을 잃고 하야하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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