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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Sep 13. 2023

몽골이 가장 두려워했던 사람은?

1219년 거란족의 일부가 고려 강동성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들의 뒤에는 세계 최강의 군대였던 몽골군이 무서운 기세로 쫓아오고 있었다. 거란으로부터 세 번에 걸쳐 큰 침략을 받았던 고려의 입장에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거란군을 격퇴해야 하였다. 몽골족이 새롭게 흥기하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일단은 거란을 공동의 적으로 생각하는 아군이었다. 같은 목적을 가진 고려와 몽골군은 공동작전을 통해 거란족을 격퇴하면서 우호적인 관계로 시작하였다.     

하지만 몽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라던 고려와는 달리 몽골은 거란을 격퇴해주었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많은 공물을 요구하였다. 그동안 강력한 힘을 가진 북방민족에 잘 대처해오던 고려의 입장에서 몽골의 요구는 굴욕적이어서 조정에서 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때마침 몽골의 사신 저고여가 1225년 고려에 왔다가 되돌아가는 길에 피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몽골은 저고여의 피살을 고려의 책임으로 떠넘기며 1231년부터 1270년 개경환도까지 6차례에 걸쳐 침략하였다. 막강한 기동력으로 고려를 헤집어놓는 몽골군에 마땅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최씨 무신정권은 크게 당황했다. 그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방법은 수전에 약한 몽골군이 쉽게 건너올 수 없는 안전한 강화도로 천도하는 것이었다. 강화도는 밀물과 썰물의 차가 크고 한강 하류에서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목의 바닷물이 매우 빠르게 흐른다. 강화도로 들어가는 물길을 모르면, 누구도 쉽게 강화도에 들어올 수 없는 이점을 이용한 것이다. 

최씨 정권은 강화도에 내성과 외성을 쌓고 자신들의 안위만을 보존하였다. 반면 고려에 남아있는 백성들은 어떤 누구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하였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생업에 종사하다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목숨 걸고 맞서 싸워야 했다.  몽골군이 백성들의 강한 저항에 물러나면 강화도에 틀어박혀있던 무신정권은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군대를 내륙으로 보내 전국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수탈했다. 


이런 과정에서 백성들의 한 줄기 희망이 된 인물이 김윤후였다. 김윤후의 출생 연도가 불분명한 것을 보면 귀족같이 높은 신분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용인 근처 백현원의 승려로 생활하던 중 1232년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처인성(지금의 용인)으로 몸을 피하였다. 김윤후는 이곳에서 더 물러날 곳이 없자 군민을 이끌고 몽골군에 맞서 싸웠다. 작은 토성에 불과했던 처인성을 우습게 본 몽골군의 장수 살리타가 적은 기병을 이끌고 돌아다니다가 숨어있던 김윤후와 처인성 백성들이 쏜 화살에 죽자 몽골군은 퇴각하였다. 이후 김윤후는 고려 조정이 몽골군을 퇴각시킨 공로로 제수한 상장군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조정에서 내려주는 모든 관직을 거부할 수는 없어 하급 지위에 해당하는 섭랑장을 제수받았다. 당시 관료와 군인들이 몽골군만 나타나면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거나, 작은 공로를부풀려 큰 포상을 받아내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김윤후는 걸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흐른 1253년, 김윤후가 충주산성의 방호별감이 되었을 때 또다시 몽골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확실한 준비를 해 온 몽골군을 맞아서 충주산성의 백성들은 김윤후를 중심으로 70여 일을 버텼다. 그러나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탓에 먹을 것이 없어지자, 사기가 땅에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김윤후가 “몽골군을 맞아 승리한다면 귀천에 상관없이 모두 관작을 제수할 것이다.”라고 외치며 관노의 증명서를 태워버리고 소와 말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과거 처인성에서 승리한 대가로 받은 관직도 포기하고, 포상금도 백성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던 김윤후의 말이었기에 충주산성의 백성들은 모두 믿고 따랐다. 그리고 끝내는 몽골군을 격퇴하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백성들이 믿고 따르는 김윤후를 무신정권은 모른 척할 수 없어, 끊임없이 동북면병마사, 예부상서를 내려주었다. 그러나 김윤후는 끝끝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자신의 입신양명을 포기하고 국가와 백성을 먼저 생각했던 김윤후가 없었더라면, 고려는 몽골의 침략에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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