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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Oct 17. 2023

혁명으로 일본을 쫓아내자. (의열단)

1919년 평화적으로 독립을 요구하는 3·1운동이 일제에 무력 진압당하자,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어요. 이런 모습에 혈기가 끓는 청년들은 일제의 만행을 더는 가만히 볼 수가 없었어요. 그중에 김원봉이 있었어요. 경남 밀양 출신의 김원봉은 1917년 국외로 탈출하여 신흥강습소에서 교육받는 등 나라를 되찾는 데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한 인물이었어요. 

김원봉은 1919년 11월 3·1운동의 실패를 보고 만주 길림성에서 13명과 의열단을 조직해요. 이들은 활동 지침으로 공약 10조와 암살 대상·파괴 대상을 채택하고, 활동 목표로 일제 침략 기관의 파괴와 침략 원흉의 응징을 내걸었어요. 그리고는 광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적극적이고 과감한 폭력 투쟁을 전개했어요. 이들의 활동이 식민 통치에 큰 방해가 되자, 일제는 의열단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했어요. 그로 인해 의열단을 비롯한 다른 독립운동 단체의 피해가 커지자, 내부적으로 의열단의 독립운동 이념과 방략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돼요.


이에 김원봉은 1922년 겨울 평소 존경하던 신채호가 있던 베이징으로 달려가 의열단의 행동강령과 투쟁 목표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론에 한계를 지적하며 무장투쟁을 강조하던 신채호에게 김원봉의 방문은 너무도 반가운 일이었어요. 또한 이런 젊은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생겼어요. 신채호는 기쁜 마음으로 김원봉과 의열단 선전 담당 류자명과 한 달여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 머물며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리고 이듬해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해요.


조선혁명선언 일부를 살펴볼까요?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애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했다. (중략) 내정 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가 누구냐? 너희들이 ‘동양 평화’ ‘한국 독립 보전’ 등을 담보한 맹약이 먹도 마르지 않은 채 삼천리 강토를 집어먹던 역사를 잊었느냐? (중략) 조선 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쫓아낼 것이며, 강도 일본을 쫓아내자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쫓아낼 방법이 없는 바이다.] 


조선혁명선언은 우선 일제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주권을 빼앗았다고 밝혀요. 앞에서 달콤한 말로 우리를 현혹하고, 뒤로는 나라를 빼앗은 일제를 결코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해요. 또한 참정권이나 자치를 주장하는 사람도 옳지 않다고 주장해요. 일제에 당한 아픈 기억은 잊히지 않으며, 자치는 치욕스러운 일이라고 강조해요. 독립운동에서도 외교론과 준비론을 비판해요. 우리가 결정하고 해결할 문제를 외국에 맡기고 처분을 기다리는 행동으로 발생한 아픈 역사를 거론하면서요. 대표적으로 3·1운동 이후 파리평화회의에 대한 과도한 맹신으로 2천만 민중의 용기와 의기가 꺾였다고 말하죠. 실력양성운동도 비판해요. 생산기관을 전부 빼앗겨 입고 먹을 방법도 단절된 상황에서 일본과 맞설 힘을 기를 수 있겠냐고 말이에요. 그렇기에 민중이 자신을 위하여 폭력을 이용한 반일 민족 민족해방 투쟁을 전개하는 것만이 독립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고 주장해요. 


<조선혁명선언>이 인쇄되어 많은 애국지사에게 배포되자 수많은 청년이 의열단을 찾아와 가입을 희망했어요. 1924년에는 의열단원 수가 70여 명을 넘어서며, 더 많은 의거 활동을 펼칠 힘을 갖추게 돼요. 하지만 1928년 <창단 9주년 기념 성명>을 계기로 계급적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급진적 민족주의 또는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해요. 대표적인 의열단원으로 부산경찰서를 폭파한 박재혁, 종로경찰서를 폭파하고 조선 총독을 죽이려 했던 김상옥, 일왕이 사는 궁성을 파괴하고자 했던 김지섭,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 등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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