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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Oct 10. 2023

콩밥을 먹게 만든 산미증식계획

1920년대에 들어서면 일제는 기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해요.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 막대한 이권을 확보했거든요. 또한 세계대전 이후 전후 처리에 복구에 들어가는 공산품을 대량 생산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제조업이 크게 발달해요. 그렇다고 일본 사람들의 삶이 향상된 것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물가가 크게 폭등하면서 서민들의 실질적인 임금의 가치가 떨어졌거든요. 여기에 이촌향도 현상으로 일본에서 쌀 수확량이 줄어들면서 미곡 가격이 폭등해요. 

일제는 자국의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는 방법으로 한반도에서 쌀을 가져오기로 해요. 쌀을 무작정 수탈하면 반발이 일어날까 걱정한 일제는 한반도에서 쌀을 증산하여 가져오는 방법을 택해요. 이것을 산미증식계획이라고 부르는데, 총 세 번에 걸쳐 이루어져요. 1920~1925년 제1기 산미증식계획, 1926~1934년 제2기 산미증식갱신계획, 1940년 이후 제3기 조선증미계획이에요. 


산미증식계획은 토지개량사업과 농사개량사업으로 나누어 추진됐어요. 토지개량사업은 30년 동안 논 40만 정보를 관개하고, 밭 20만 정보를 논으로 바꾸며, 20만 정보의 토지를 개간하여 총 80만 정보의 토지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어요. 여기서 관개라고 하는 것은 저수지나 제방 등을 만들어 농지에 물을 공급하는 것을 말해요. 조선총독부는 관개 사업을 추진한다는 명목으로 수리조합을 만들고 운영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어요. 왜냐하면 자작농을 강제로 수리조합에 가입시킨 뒤 회비 등 여러 명목으로 돈을 강제로 징수하다가 더는 납부하지 못하면 논을 빼앗으려고요. 농사개량사업은 일본인이 먹는 쌀의 품종으로 개량하는 동시에 비료를 통해 수확량을 증가시키는 것이에요. 이것은 산미증식계획이 일본인을 위해서 이루어진 정책임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해요. 


제1기 산미증식계획에서 일제는 15년 동안 900만 석을 더 생산하여 460만 석을 가져가려 했어요. 하지만, 경제 불황으로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데 실패했고, 지주들도 토지개량보다는 헐값에 토지를 사들이는 것을 선호하며 참여를 꺼렸어요. 그 결과 실패하고 말아요. 이에 일제는 정부 자금을 더 투입하며 제2기 산미증식갱신계획을 실행하지만, 일본 내부 사정으로 실패하고 말아요. 1930년 일본에서 일어난 농업 공황으로 쌀 가격이 폭락하자, 일본 농민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했거든요. 일본 농민들은 거리로 나와 한반도에서 들여오는 값싼 쌀 때문에 자신들이 다 죽게 생겼다며, 쌀 수입을 막았어요. 그 결과 1934년 제2기 산미증식갱신계획은 중단하게 돼요.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군량미 확보와 가뭄으로 인한 식량 위기로 제3기 조선증미계획을 다시 실행해요. 


산미증식계획은 실패한 정책이지만, 한국인에게 큰 피해를 준 정책이었어요. 쌀의 생산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으로 가져간 쌀이 더 많아 한반도의 식량 사정이 매우 나빠졌거든요. 1912년 1인당 쌀 소비량 0.77석이던 것이 1936년에는 0.38석으로 줄 정도로요. 일제는 한반도의 식량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주의 잡곡과 베트남 쌀을 들여왔지만 도움이 되지는 못했어요. 한국인은 늘 배를 곯아야 했어요. 또한 자작농이 수리조합비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토지를 상실하자, 일본인과 친일파 조선인 대지주는 이 기회를 이용해 토지를 늘려갔어요. 이것은 사회문제로도 연계되어 한반도에서 소작쟁의가 연일 일어나요.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농민들은 생존권 투쟁을 넘어 항일투쟁으로 발전시키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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