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필요한 단어 : 끈기

체력과 도구에서 끈기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by 생산적생산자


FTA 수난기


뜬금 없고, 물어본 적도 없겠지만, 나는 회사의 원산지 관리 담당자다. FTA 업무는 예전 사수가 전담이고, 나는 도와주는 역할이었다. 사수가 잘못된 조직 변경으로 퇴사하면서 일절의 인수 인계 없이 내가 업무를 맡게 됐다. 솔직히 FTA에 대해선 잘 몰랐다. 선배가 시키는 부분적이고 기능적인 업무만 수행해왔을 뿐이었다. (우리는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혼자서 업무를 맡은 이후로 나름대로 공부를 했고 실제 FTA의 흐름과 관리에 대해서 알게 됐다. 알려고 하면 예전에도 알 수 있었지만, 굳이 알아야 할 이유는 없었기에 유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나씩 공부하고 업무를 진행하면서 내가 이전에 하던 부분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 흐름의 결과가 어떤지 알게 됐다. 사람은 상황이 주어지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게 된다. 그런 면에서 원하지 않았던 책임으로 인해 나는 한층 더 성숙하고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됐다. 회사에서의 성장이 굳이 필요하냐 하겠지만, 회사에서 이렇게 큼직하면서도 지난한 업무를 맡게 되면서 회사 외적으로도 장기 프로젝트를 끌어가는 연습을 할 수 있었다.


2018년 전담하게 되면서 50개의 업체에서 원산지 확인서를 받아야 했다. 이전에 선배에게 몇 개 업체를 받아서 하던 게 전부였다. 이젠 모든 업체를 담당하게 됐다. 그리고 이전엔 선배가 하던 검토도 모두 내가 해야 했다. 나는 여러 개의 협정별 결정 기준이 뭐가 맞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FTA는 다른 팀과 업무 분장이 걸려있어 다른 팀 선배에게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옆집 사람한테 배우는 건 불편했다. 매년 2월 까지는 원산지 확인서 수령을 모두 해야 한다. 1월 수출분에 대한 원산지 증명서가 2월 부터 발행되기 때문이다. 2018년에 업체와 씨름하면서 확인서를 받다가 4월이 되서야 모든 업체의 확인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유를 분석해보면 평소 담당하지 않는 다른 공장의 업체까지 맡아서 했기 때문에 요청을 해도 잘 안되는 경우가 많았다. 업체가 말을 못 알아먹고 피드백 하고, 다시 등록하고, 피드백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지쳐갔다. 힘들기도 했고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업무는 늦어졌고 4월이 되서야 모든 업무를 마무리했고, 그 때까지 옆집 선배의 눈치를 계속 봤던 게 기억난다. 업무는 다른팀이랑 걸리면 안 좋다. 아예 넘겨버리는 게 제일 좋고, 아니라면 그냥 혼자서 똥을 싸고 치우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사실 나는 FTA 업무의 어려움과, 회사 생활의 고난, 그리고 그 후 찾아온 역경의 극복과 성장에 대해서 얘기 하려는 게 아니다. FTA 업무를 하면서 익혔는지, 아니면 다른 일을 하면서 익혔는지 모를 '끈기'에 대해서 얘기해보고자 한다. 끈기는 집착과 비슷하면서 다른 말이다. 회사에서 끈기라는 단어가 어떻게 작동하고 끈기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사례를 한번 보고 끈기가 업무 생산성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다.



끈기라는 놈

2018년에 많이 아팠다. 김경호의 노래 첫 소절이 생각나는 대목인데 정말 아팠다. 그러고 나서 시작한 필라테스로 체력을 키웠다. 미생에서 나왔던 체력이 있어야 회사 일도 잘 버틸 수 있다는 (장그래가 아침에 산 뛰어 다니는 장면) 말은 사실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체력을 길러서 회사에 소비하느니 그냥 안 좋은 체력으로 사는 것도 괜찮다 생각했는데 틀린 생각이었다. 체력이 올라가니 업무하다가 퍼질 수 있는 상황에서 한걸음 더 가게 된다. 스쿼트를 할 때 타오르는 허벅지의 고통을 버티면서 카운트 하나를 더 올리는 과정과 비슷했다. 맞다. 고통을 적극적으로 버티는 변태가 되는 것이다. 회사에서 굳이 그런 고통을 찾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버틸 수 있는 건 능력의 차원이고 힘든 업무라도 능력의 범위 안에 있으면 여유를 갖고 대할 수 있다. 업무 시간에 대한 끈기는 아니다. 일이 늘어지거나, 미궁에 빠졌을 때 한걸음 더 내딛고, 한번 더 전화할 수 있는 포기 하지 않음의 영역이다.


나는 이전부터 체력이 좋지 않아서 집에 빠르게 가야 하는 사람이었고, 끈기가 없었기 때문에 업무를 하다가도 중간에 그만 두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선배나 팀장이 찾으면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생산성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다시 그 일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 바로 그 당시의 지점부터 요시땅 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시 기억을 복원해야 하고 찾아봐야 하고, 이전에 했던 고민과 번뇌의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명백한 시간 낭비다. 메일을 보고 있는데 나중에 답장한고 새로운 답장의 아이디어가 샘솟을까? 연애 편지에선 상대방의 마음을 잡아 끌 대목이 떠오를 수 있겠지만, 이메일에 대한 답변은 창의의 영역이 아닌 생산성의 영역이다. 체력을 기반으로 한 끈기가 뒷받침 되면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도구적 끈기, 끈기적 도구


그리고 체력 외에 끈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도구이다. 50개의 업체에서 한 개의 아이템만 납품하는 게 아니다. 비제조 업체의 경우 10개 이상의 아이템을 납품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아이템마다 개별적으로 체크해야 한다. 이런 업체가 쌓이면 수백개의 아이템을 관리하게 된다. 한 업체를 하다가도 잘못된 부분이 나와서 업체에 요청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미치고 팔짝 뛰고 싶은 경우는 하나의 업체랑 업무가 거의 다 끝나가는데 어디까지 했는지 모를 때이다. 아마 전화로 얘기할 때 메모를 안해서일 수도 있는데 이럴 경우에 업체에 전화해서 '우리 어디까지 했었죠?'라고 물어보는 것도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부끄러움이 생겨서 일이 지연될 때도 있다. 그래서 일을 끝내려면 날짜별로 어디까지 진행했는지 메일에 남겨 놓거나, 기록으로 남겨놔야 한다.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워크플로위라는 프로그램에 업체별, 아이템별, 날짜별 기록을 하면서 업무를 진행했다. 그렇게 하고 메일로도 남겨 놓으니, 서로 부끄러운 상황을 방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끈기있게 일을 하려면 도구적인 받침도 있어야 하고, 도구가 우리를 끈기 있는 사람으로 만들 때도 있다.



2019년은 뭐가 다른가?


그렇게 체력과 도구로 끈기를 장착한 이 대리의 2019년 FTA는 어떨까? 워크플로위에 업체별로 하나씩 봐야 할 체크 리스트를 옆집 선배와 확정했다. 물론 초안은 내가 작성했다. 그러고 나선 체크 리스트를 아이템마다 복사해서 체크하면서 아이템에 대한 확인서를 챙겼다. 확인 완료한 부분은 완료 처리해서 안볼 수도 있다. 그리고 업체별, 아이템별 진행 상황을 기록해놨다. 수령 완료된 업체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는 맛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체력이 좋아졌기 때문에 '빌런' 같은 업체가 나타나더라도 화를 안 내면서도 되도록 친절하게 설명하고 수정할 수 있었다. (분명히 아닌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서 2019년 2월까진 (확인서 수령 마감 기간) 모든 확인서를 다 받을 예정이다. 예정이라는 말은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인 걸 회사 다니시는 분들은 모두 알 것이다. 하지만 진짜 그럴 예정이다. 2월 안에 큰 빌런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완료할거라 믿고 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챙겼기 때문에 옆집 선배나 팀장에게도 당당하다. 나는 끈기를 통해서 한층 성장할 수 있었고, 협력 업체에 사려 깊은 원산지 관리 담당자로 이미지 메이킹을 할 수 있었다. 실제 담당자 분들이 그렇게 생각할지는직접 듣지 못했기 때문에 알 순 없다.




엄한 곳엔 발휘하지 말아야


회사에서 필요한 단어는 많고, '끈기'는 그 중에 하나일 뿐이다. 끈기는 좋은 것이고, 사라질 때도 있지만, 갖고 있으면 좋다. 업무 시간에 대한 끈기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빨리 일하고 집에 가는 게 회사 생활의 유일한 목표인 사람이다. 회사 일 이외에도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끈기는 발휘하기 시작하면 업무 시간을 단축 시켜준다. 지금 하지 않고 나중에 다시 하면 낭비될 시간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끈기엔 체력적인 뒷받침도 필요하지만 도구적인 도움도 필요하다. 여러분의 회사 생활이 넘치는 체력과 스마트한 도구의 조합으로 끈기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 끈기가 여러분의 다른 삶의 영역(예를 들면 진짜 하고 싶은 일)으로도 확장됐으면 하고 천지신명께 빌면서 끈기에 대한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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