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 '최'와 첫 만남을 갖게 해 준 위탁교육
오늘은 필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 하려고 한다.
내가 벌써 이곳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이전 글에서 밝혔듯 내 브런치의 목적은 단 하나, 군 생활 간 경험하고 느낀 점들을 담아 책을 한 권 출판하려고 한다. 군 생활중 만난 가장 친한 동기 '최'가 있는데, 그 동기와 함께 둘의 이야기를 묶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 예정이다. 동기는 브런치 작가 활동을 하지 않아서 편의상 '최'라고 호칭하겠다. 우리의 출판 준비는 꽤 체계를 갖췄다. 주 1회 대면회의도 진행하고 있고, 자체적으로 진도율을 측정하고 있으며 동시에 둘 다 기혼자로서 각자의 배우자에게 감수도 받고 있다. 나름 규율을 갖추고 일정을 반영하여 추진중인 둘 만의 비공식 프로젝트인셈이다.
출판 경험이 있는 분들은 더 잘 아시겠지만, 책을 쓰려면 먼저 목차를 만들어야 한다. 책 속에 둘의 의견이 모두 반영될 수 있으려면 책의 구성과 목차가 더욱 중요하다. 크게 두 개의 파트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군대 관련 경험과 지식 및 노하우 등을 전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군대 속의 우리 이야기를 담는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쓰려면 자연스럽게 첫 만남부터 전개가 시작되어야 하는데 오늘 그 이야기를 써보려고 한다. 즉 파트2의 첫 시작을 이끄는 꼭지이다. 시작부터 서론이 조금 길었는데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동기 '최'와 첫 만남 그리고 군 위탁교육에 관한 이야기다.
본격적인 이야기 시작 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위탁교육'이 무엇인지 간략하게 설명을 하겠다.
"위탁교육(전문교육)”이란 전문분야에 근무할 사람의 일반 학문 지식 또는 군사·직무지식을 향상하거나 자질향상 및 직무수행능력 향상을 위하여 국내·외 대학(대학원을 포함한다.) , 국외 군사교육기관 및 그밖에 교육·연수·연구기관에 위탁하여 실시하는 교육을 말한다. *출처 : 군 위탁교육 관리 훈령(국방부 훈령 제1926호 제2조 정의) https://law.go.kr/LSW/admRulLsInfoP.do?admRulSeq=2100000049211
쉽게 말하면 군에 필요한 특정분야 전문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 외부기관에 교육을 위탁하는 것을 말하며 발생하는 경비는 군에서 제공하는 것이다. 외부 교육시설에는 국내외 대학원 석, 박사과정 그리고 각 국의 군사교육시설 등을 포함한다. 참고로 '16년도 당시에 '최'와 나는 미국의 군사교육시설에서 위탁교육을 받았고, '21년도 올해부터는 동대학원에서 각자 다른 전공분야를 수학 중에 있다. 여기에 '18년도에는 같은 기수에 대위 지휘참모과정을 수료했으니 어쩌면 우리 둘은 친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위탁교육에 관한 짧은 설명이었고, 추가적인 사안은 따로 반영하여 작성하겠다.
'최'와 내가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16년 8월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위였던 필자와 '최'는 '17년도 위탁교육생을 선발하는 면접장소에서 처음 만났다. 지원했던 과정은 3명을 뽑는 과정이었으니까 우린 경쟁자로 처음 조우한 것이다. 필자의 경우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기도 전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서 4년을 다니고 당시에 장교로 3년을 복무했었는데 이렇게 선발을 위해 면접을 보는 것은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민간회사나 공기업은 어떻게 진행하는지 잘 모르지만, 군에서 위탁교육을 선발하는 절차는 2개월 정도 전에 공고를 올리고 희망하는 과정에 지원자격이 충족되면 원서를 작성한다. 그리고 1차 서류 과정이 통과하면 면접대상자들을 2차로 소집하여 집단 및 개별 면담을 실시하게 된다. 이후에 품성평가 및 근무평가 등의 종합정보를 고려해서 합격자를 발표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16년 여름 당시 우리는 면접 전 어색하게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지원자의 개인정보를 식별하지 못하도록 계급과 이름 기타 표식들을 제거하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녀석이 내 라이벌이구나." 3명을 뽑는다고 명시했지만 정확하게 몇 명이 지원했는지 알 수 없고 기본적으로 선발 조건이 장기복무자였으니 당시 필자가 중위였음을 고려하면 최소 장기복무를 1차로 합격한 인원이라고 추측만 할 수 있었다. 군에서 장기복무를 1차로 선발된다는 것의 의미는 상당하다. 지원하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실력자란 이야기다. 또 당시 선발 계급이 중위 ~대위(진)이었으니 선배들도 여럿 지원했었다. 위탁교육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일반 독자들이 들어도 상당히 파격적인 조건이니 많은 이가 꿈꾸고 지원을 희망하리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각 과정마다 상이하지만 '21년 올해를 기준으로 보면 지원자 대비 합격자의 비율이 평균 약 4.5 : 1 정도 된다. 사관학교 입학시험 후 오랜만에 겪어보는 선발시험이기에 잔뜩 긴장한 필자는 준비한 예상문제를 보면서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길 바랬다.
당시 집단토론의 주제는 '현 안보상황을 고려하였을 때 파병을 보내는 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찬성과 반대를 논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핵심은 정해진 모범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찬반 여부보다 그것을 선택한 본인의 논리력을 살피는 테스트였다. 물론 당시 중위였던 필자가 이런 메커니즘을 알고 있었을 리가 없다. 주제를 알려주고 각자 준비할 시간은 10분밖에 못 받는데, 핸드폰을 포함한 어떤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오로지 평소의 사고와 사색을 통한 답변이 가능할 뿐이다. 당시 내가 했던 답변을 정확하게 기억을 하진 못한다. 다만 토론장에 머리를 정갈하게 빗질해 가른 어떤 한 녀석이(?) 답변을 쫌 하는데 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물론 '최'였다.) 그렇게 짧은 첫 조우의 순간을 뒤로하고 우린 각자가 속한 부대로 복귀했다. 결과는..? 운이 좋게도 합격이었다. 만약 당시에 필자나 '최'가 불합격하는 슬픔의 고배를 마셨다면 오늘 이 브런치 글을 포함한 미래의 우리의 책은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결론은 해피엔딩이었다. 우리 둘은 출국 전에는 서로 접점이 없어서 서먹서먹했지만 미국에서 함께 동거 동락하며 우정을 키웠다. 고국을 떠나 머나먼 타지에서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서로가 의지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우산을 같이 쓰면 연인이 되고, 비를 함께 맞으면 동지가 된다." 우리의 첫 만남은 '경쟁자', 그리고 '동기'가 되었다가 지금은 둘도 없는 '동지'가 되었다. 이제는 책도 같이 쓴다는 명목 하에 일주일에 한 번씩은 의무적으로 만나야 하는 관계다. 최가 이 글을 좋아할지 모르겠다.
합격자는 나, '최', 육사동기A, 이렇게 3명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합격은 했는데 막상 미국에 가서 미군들과 함께 군사교육을 받을 생각을 하니 덜컥 걱정이 앞섰다. 출국 전 필자의 영어실력은 TOEIC 920~950점대, OPIc 영어 말하기 성적은 AL(Advanced Low)이었다. 점수로 계량화해서 평가받는 것은 우리나라 입시교육에 맞추어서 나름 자신이 있었는데 이젠 정말 실전을 앞두고 있는 것이니 큰 부담감이 찾아왔다. 더군다나 필자가 가는 교육은 미군의 초급장교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보수교육으로 여타 다른 위탁교육과 다르게 체력적으로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과정이었다.(한국군의 경우 OBC와 상응하는 과정) 여기서 다른 과정이라 하면 대학원 석, 박사이며 군사교육도 대부분 대위 ~ 소령을 대상으로 실시하는데 이 경우 군사지식을 습득하는데 치중되어 있어서 육체적으로 활동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행히 지금 필자와 '최'는 이 다른 과정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 지금 다시 그 교육을 받으라고 권유를 받는다면 정중히 거절하겠다.
합격 발표는 '16년 9월에 났고, 출국일자는 '17년 3월 초로 확정이 났다. 우리 과정의 3명의 선발자들은 한국군끼리 묶어서 보내면 한국어를 쓰고 몰려다니면서 본업에 전념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상급부대의 우려에 따라 동일과정 각기 다른 기수로 출국하게 되었다. 한 개 기수 씩 차이를 두고 편성되었고 필자가 그 중간인 두 번째 그리고 '최'는 첫 번째로 출국이 예정되었다. 출국 전까지 맘 편히 준비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면 좋겠지만, 주어진 현재의 직책에 따른 임무가 우선이었다. 당시 필자는 대대의 군수과장 보직에서 참모업무를 수행 중이었다.
업무를 배우고 처리하고 퇴근하면 이미 늦은 저녁이 되었지만, 틈틈이 미국 군사교육을 받기 위한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왜냐면 똥줄이 엄청 탓 기 때문이다. 부족한 영어회화 따라잡기 위해 아침 6시에 전화영어로 하루를 시작했고, 교육기관이 위치한 미국 남부의 조지아주의 강렬한 더위속에서 기동훈련에 대비해서 퇴근 후에는 완전군장을 들고 연병장을 뛰었다. 그렇게 준비를 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금방 흘러갔고 출국날이 다가왔다. (다음에 계속)
* 두서없이 글을 쓰다 보니 생각보다 많이 길어질 것 같아서 한 번 끊어서 이어가겠다.
<표지 배경 출처 : 필자의 지난 추억>
'17년 당시 미국 군사교육 졸업행사에서 동고동락을 함께 한 동기생 그리고 교관님들과의 단체사진이다.
위 사진 속에서 필자를 찾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