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운 글쓰기

퇴고는 지우기부터

by 눈 비 그리고 바람

언제부턴가 나의 퇴고는 지우는 일이 전부가 되었다.

부사를 골라내고, 접속사를 솎아 낸다. 글 전체의 맥락에 방해가 되는 단어나 문장도 걷어 낸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지우는 일이 이제는 글을 쓰는 행위가 되었다.


“모든 초고는 걸레다”


헤밍웨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노벨 문학상과 퓰리처상을 연거푸 받았다. 그런 그도 초고는 걸레라 표현했다. 내가 쓴 초고라고 다를 게 없다. 생각을 차례로 계산한 영수증에 지나지 않았다. 맥락을 벗어난 단어는 혼자가 심심했던지 형형색색의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른 문장은 현실을 넘어 추상적인 그 무엇이 되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글. 이런 글을 마주하면 내가 쓴 글이 아닌 듯하다. 베낀 글 같다며 글의 호적을 운운한다.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은 속 좁은 사람이 들려주는 사사로운 삐짐과 푸념이지 어정쩡한 말로 모든 이의 표심을 구걸하는 글이 아니었다.


문득 2년 전 처음 완성했던 글이 생각난다. 그때는 한 편의 글을 완성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나도 글을 쓸 수 있다는 가능성에 감사했다. 퇴고라는 개념도 없었다. 내가 가진 모든 지식과 필력(?)을 갈아 넣었다는 생각은 퇴고를 불필요한 행위 즈음으로 생각했다. 글 한편 쓰는데 2주가 넘게 걸렸다. 넌덜머리가 났던지 초고 그대로 발행을 눌렀다. 근본 없는 자신감이 낳은 초고는 먼 훗날 나의 바닥이 된다. 나의 애착 걸레는 그렇게 탄생했다.


지금도 블로그에 가면 내 첫 글을 볼 수 있다. 문장이 길어 숨도 쉴 수 없다. 문장 사이사이 끼어 있는 부사들이 내 허리에 낀 지방처럼 가득하다. 나는 글이 잘 안 써지거나 힘에 부칠 때면 과거에 쓴 글을 찾아가 읽곤 한다. 다른 이의 날렵한 글을 보며 좌절하는 것보다 풋풋함이 주는 순수함을 보며 위안을 얻는 편이 좋으니까. 내 바닥 한 번 더 두드리며 확실한 바닥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고 웃음도 덤으로 따라온다.


책에서 본 적 있다. 글에도 경제성의 원리가 있다고. 없어도 되는 표현이나 문장 또는 단어가 있을 때는 과감히 지우라고 한다. 처음 이 글을 읽었을 때 근거 없는 반항심이 고개를 들었다. 어렵게 쓴 글을 왜 지우냐, 지울 거면 왜 쓰냐, 다 지우고 나면 의미 전달이 되겠냐, 글자 몇 개 더 쓴다고 아깝냐 등등 이런 수준의 답변이 쏟아져 나왔다. 글 몇 번 써봤다며 거들먹거렸다.


무지한 존재가 지혜의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는 엉뚱함을 반복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밑져야 본전이다는 생각은 딴짓에 과감함과 정당성을 부여했다. 다 썼다고 생각한 글과 마주했다. 발행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은 호기심이 삼켜 버린 후였다. 기본과 원칙에 따라 선을 그었고 기어이 지웠다. 간혹 가다 실수로 잘 쓴 글,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달콤한 글, 보험약관에 나올 법한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한 글까지.


지우면 지울수록 뜻이 생겨났다. 부담스럽던 글이 담백하게 변해간다. 글이 없는 곳에 뜻이 피어났다. 왜? 라는 질문에 한참 동안 침묵했다. 라면을 레시피 대로 끓였을 때 느낀 그 맛을 기억한다. 적당한 짜기와 맵기로 혀를 농락하던 그 맛. 좋다는 거 맛있다는 거 다 때려 넣으며 본래의 맛을 잊어가던 찰나. 라면 봉지에 무심하게 적혀 있던 레시피가 처음부터 답이었던 사실을 알고 무릎 탁 치던 그날이 떠올랐다.


넣으면 넣을수록 잃어가는 글 맛과 빼면 뺄수록 담백해지는 글의 절묘함을 기억한다. 글을 쓴다 라는 말은 글을 지우기도 한다는 말의 같은 뜻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는 오늘도 쓰면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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