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첩과 글

글에 슬픔을 더 자주 남기는 이유

by 눈 비 그리고 바람

얼마 전 스마트폰 사진첩 정리를 했다.

시점 별로, 장소별로 나누고 회사 업무를 위해 찍었던 사진은 지워나갔다. 나누고 지우다 보니 묘한 쾌감이 들었다. 복잡하던 내 머릿속 생각이 각얼음용 트레이에 차곡차곡 들어차며 정리되는 느낌이랄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편을 가르고 싹을 잘랐다.


한참을 나누고 자르다 보니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사진 속 미소가 얼마나 어색하고 수줍은가에 대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하나같이 웃고 있다는 점이다. 사진 찍을 찰나마다 기쁨에 겨워 웃음꽃이 피어났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사실 정도는 불혹의 직감만으로 충분했다. 대개는 김치나 치즈가 만들어준 가짜베기 웃음이라며 사진 속 웃음을 애써 지어 보였다. 거울을 보진 못했지만 쓴웃음이 분명했다.


나는 내가 예전에 썼던 글을 작정하고 읽을 때가 있다. 스마트폰 사진첩 정리하듯 글도 정리하겠다는 건 아니고, 단지 당시 느꼈던 감정에 대한 연민 또는 그리움 때문이랄까? 정의되지 않고 분류되지 못한 감정의 덩어리를 두 손으로 받치곤 어쩔 줄 몰라 쉬이 흘려버렸던 시간들. 삶의 매정함에 놀라 쏟아버린 감정을 모았다면 지금쯤 강이 되었을 거라며 안타까워했다. 더 이상의 아쉬움은 안된다며 일기처럼 시작한 글쓰기가 어느덧 나의 일부가 되고 전부가 되어가고 있다. 죄다 삶에 치여 끄적일 수밖에 없었던 절망과 좌절뿐이지만, 내 몸에 남아있던 멍울이 점점 없어지는 걸 보면 치유의 과정임이 분명했다.


고통에 잠식되어 숨쉬기조차 버거운 글과 마주할 때면, 입에는 침이 고이고 머리에는 피가 돌았다. 누가 더 궁상맞고 비참하다를 가늠하며 통점의 크기를 저울질하려는 의도 보다는, 단지 나의 바닥을 뒤적이며 지나왔던 과거의 애잔함과 간절함이 떠올랐기 때문인 듯했다. 저절로 고개가 떨구어진다. 시큰하고 쨍한 기운이 가슴으로 스미자 눈밑에 따뜻한 무언가가 차올랐다. 눈썹을 추어올리며 눈 크게 뜨고서 태연한 척 바닥을 응시했다. 그 따스한 감각이 말라 없어지길 바랐다. 이런 행위를 한참 동안 반복하고 나면 뜨끈뜨끈한 콩나물 국밥 말아먹은듯한 개운함이 온몸을 데웠고, 몸에 축척되어 있던 염증은 눈물과 땀이 되어 쓸려나갔다. 글에 치유력이 있다 보다는 쓰고 읽고 감화하며 공감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채무관계에 그 힘이 발휘되는 듯했다.


이런 글이 가진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특정한 운율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감정을 차례로 이입해야 열리는 현관문도 아니었다. 단지 슬픈 사람에게만 나는 특유의 글냄새가 있다는 것. 코끝이 찡해지는 시큼함과 간지러움이 점철된 글에서 느껴지는 그 냄새 말이다. 어설프게 연출한 가짜베기 슬픔이 아닌 진짜베기 고통이 녹아든 글에서 취할 수 있는 감성이다. 한 가지 함정이 있다면 착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투명한 옷이 있듯 어둡고 캄캄한 터널을 뚫고 빛을 본 이들만 감각할 수 있는 글이라는 거다. 어떻게 보면 내가 힘들 때 써 내려간 글은 살기 위해 쓴 글이고, 그 글에서 익사한 고통은 나에게 최적화된 담금주가 되는 꼴이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내가 쓴 슬픈 글에 유독 더 눈이 갔다. 비슷한 글을 읽고 싶다고 해서 고통에 겨운 글만 쓰지는 않았지만 그때는 안 쓰면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쓰기에 고통보다 쓰지 않았을 때 추스를 수 없었던 마음의 고통이 더 컸기에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제는 감정의 기복도 많이 안정된 상태.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해도 크게 탈 날 것 없는 요즘이다. 군 복무하던 그때가 그렇게 싫었지만 지나고 나면 그립기도 하듯 나도 슬펐던 그날이 그래서 그리운가 보다.


김치와 치즈로 변색된 웃음 뒤 씁쓸함이 사진 속에 만져진다면, 슬픔과 연민으로 뒤덮인 좌절 뒤에 희열이 내 글에서 느껴지는 듯하다. 그때야 그렇게 힘들었지만 지금은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까? 남는 게 사진밖에 없다는 말보다, 남는 게 글밖에 없다는 말이 내 귓전을 울린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