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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 비 그리고 바람 Jan 20. 2024

저는 글이 보이네요

 언제부턴가 글이 보이기 시작한다.

글이 보이지 그럼 냄새로 맡는 거냐? 하겠지. 피식 웃음이 났다. 주의를 끌기 위한 자극적인 글이 아닌데 본의 아니게 그런 글 같아 보였다. 정말 나는 글이 보인다고 말하는 건데.


내용인즉슨, 활자가 단순히 시신경에 의존하는 단어 그 자체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소리도 아니다. 읽는 순간 단어 뜻을 음미하기 전에 특정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음성으로 읽고 나서 머릿속에 맴도는 것도 아니고, 읽는 즉시 영상화라니.


며칠 전 일이다. 회사 점심시간, 나는 점심을 빨리 먹고 어김없이 책을 펼쳤다. 대낮임에도 땅꺼미가 깔린 듯 어두웠다. 기를 쓰고 들어오려는 빛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블라인드에 막혀서다. 누런색 스탠드에만 의존한 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얼마쯤 읽었을까. 식곤증과 피곤함이 몰려왔다. 졸음도 같이 왔는지 눈꺼풀이 그냥 내려앉으려 했다. 자는 것도 아니고 읽는 것도 아닌 모호한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전날 잠을 설쳤지. 대중없이 감기는 눈꺼풀 앞에 장사 없구나 했다. 읽고 싶은 욕망도 컸지만, 수면의 욕구를 당해낼 핑계가 나에겐 없었다.


눈만 끔뻑이며 한참을 더 졸았다. 아니 꿈을 꿨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얕은 잠에 빠져 가위가 눌린듯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글을 읽어도 그 뜻이 생각나지 않는 거다. 대신 영상이 떠올랐다. 음성 정보가 자동으로 그림이나 영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찰나의 콩트 같기도 하고, 유튜브에 흔히 볼 수 있는 유사 영상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활자가 시신경으로 들어왔는데 나를 거치지 않았다. 신기한 사실은 책 내용은 쏙쏙 들어왔다는 거다. 일련의 독해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처리되는 과정이 신기했다. 누군가가 와서 대신 읽어주고 요점만 영상으로 정리해 주는 것 같다랄까? 


보인다는 영상은 모두 다 내 경험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간 겪었던 장면, 경험, 감정 같은 것들이 대부분. 언제 이렇게 모았나 싶을 정도다. 수다스런 단톡방에 흔히 볼 수 있는 난잡스런 이모티콘 같기도 했다. 글 내용은 빨리 스쳐가는데 그만큼 내용도 쏙쏙 들어왔다. 


내가 읽던 책은 나에게는 읽기 어려운 책이었다. 문장 대부분은 만년체. 외국 저자들의 책을 번역한 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다. 독해가 쉽지 않았다. 지금은 달랐다. 활자의 영상화를 통해 해석된 글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주어도 또렷하고 술어도 명확했다. 읽는다는 행위보다 속도도 더 빨랐다. 다시 읽는 일도 없었다. 가위눌림이라면 기분이 나빠야 정상일 텐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누군가 나를 관전하는 이가 있다는 증거 같기도 했다. 하도 바보같이 읽으니까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럴까란 생각도 들었으니까.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불현듯 켜지는 불빛에 놀랐다. 어느새 점심시간은 끝이 났다. 주변을 둘러봤다. 다들 아침에 알람 듣고 일어난 듯한 모습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 책상을 봤더니 읽다만 책은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좀 전까지 가수면 상태의 독서하던 상황이 떠올랐다. 활자가 살아 움직이던 한 편의 뮤지컬 같던 순간. 그 감각을 붙잡느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주변의 눈치가 보였다. 얼른 책을 덮었다. 지금 덮으면 영원히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펼쳤다. 잠깐 읽었는데 뮤지컬은 계속 이어졌다. 너무 감사했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하며 책을 덮고는 일하는 척했다. 모니터만 보고 있자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잠시 후 하늘을 봤다. 천장에 수놓은 형광등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는 나를 촘촘하게 보고 있구나란 생각이 든다. 오늘 저녁에도, 내일도 책을 읽어야지 다짐했다. 수없이 펼쳐질 뮤지컬에 그저 마음이 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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