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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 비 그리고 바람 Oct 20. 2024

당근 중독

 당근 중독이다.

먹는 당근 아니고 당근거래를 말하는 거다. 오늘도 퇴근 후 슬그머니 소파에 몸을 붙인다. 가급적 천천히 그리고 비스듬하게 눕는다. 자리를 잡으면 등받이에 한쪽 다리만 올려 걸친다. 최대한 건방지게 자세를 고쳐 잡는다. 이렇게 누워야 쉬는 맛도 배가 되는 것 같다.


가장 편한 자세로 당근 어플을 누른다. 앙증맞은 당근 모양이 친숙하다. 벌써부터 설렌다. 오늘은 또 어떤 물건이 올라와 있을까. 당근은 중고 물품을 사고파는 어플이다. 단순히 중고 거래라기보다 가까운 이웃 간 거래라는 전제조건이 붙는다. 내 위치를 인증하고 동네를 정해 근처 사람들끼리 거래를 한다. 이웃이라는 점에서, 얼굴을 보고 거래한다는 점에서 더 믿음이 간다. 덕분에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사기에 대해서 덜 걱정하는 것은 사실이다.


어떤 날은 가지고 싶은 물건을 동네 마트 가듯 거래하는 날도 있다. 즉시 거래라는 점에서, 저렴한 제품이라는 점에서 끊을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나 같이 돈 없고 성질 급하고 순진하기까지 하다면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얼마 전에도 거래를 했다. DSLR을 9만 원에 구입했다. 당장 사고 싶다 했더니 당장 팔고 싶다며 연락 왔다. 근처 약속장소로 나갔다. 심장은 마구잡이로 뛰었다. 발걸음도 빨라서 심박수에 맞춰 걷는 기분까지 든다. 판매자는 이미 나와 있었다. 5분 뒤 나오라고 했음에도 한달음에 나온 듯했다. 그녀도 팔고 싶어 그랬겠. 마냥 신기했다. 얼른 팔아치우고 싶은 사람과 얼른 사고 싶은 사람이 만나면 반사적으로 교환이 이루어진다.


“9만 원이죠?”

“네 계좌는 xxx입니다”

“방금 보냈어요 감사합니다”

“잘 쓰세요~”


마트에서 무심하게 아이스크림 하나 골라 결제하는 것 같다. 주변 시선도 부끄럽고, 빨리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에 일단 교환부터 하고 보자 주의다. 어차피 계좌에 이름도 찍혀있고 당근온도라는 적립 제도가 있었기에 개의치 않는다. 3년을 거래해도 이제 겨우 42.8도 인걸 보면 쌓기 쉽지 않은 건 사실이다. 자칫 잘못된 거래로 신고당하면 온도는 와르르 무너지기 때문이다.


얼른 카메라 매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녀도 내가 돌아서기 무섭기 종종걸음으로 되돌아간다. 집으로 가면서도 가슴에서 울리는 쿵쾅거림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혹시 그녀가 나를 보는 것은 아닌지 힐끔 돌아봤다.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나는 안도에 한숨을 쉰다. 그제야 어깨에 맨 카메라가 눈에 들어온다. 가방 여기저기를 후비며 구성품을 확인한다. 땅거미가 내려앉는 거리에는 사람들이 여럿 오가고 있었다. 나는 마치 내 물건인 양 익숙하게 꺼내 만졌다. 사실 내 것인 냥 할 필요는 없다. 훔치듯 가져오긴 했어도 내 물건임은 사실이니까.


다행히 물건은 별문제 없어 보였다. 이 카메라는 DSLR 시조새와도 같은 제품이다. 입문이나 취미로 들고 다니기보다는 골동품에 더 가깝다. 과거 대학생 시절 추억이 있다. 그때도 지금처럼 스마트폰은 있었지만 사진을 찍기 위한 용도는 버거웠다. DSLR과 같은 큰 카메라가 유행했다. 당시 여행지를 가면 정말 ‘찰칵’ 소리가 나는 카메라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때는 그들이 부러웠다. 커다란 악기 가방 메고 다니는 음대생들을 선망했던 것처럼 커다란 대포를 들고 다니는 그들이 있어 보이고 멋있어 보였다.


세상은 많이 변했다. 강산이 한 번 하고도 반이 더 바뀌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대포가 헐값에 올라온 것이다. 본능적으로 끌렸다. 당장에 사서 어떻게 써야겠다 보다는, 막연한 과거 욕망에 끌렸다. 제품은 생각보다 크고 무거웠다. 이런 괴물을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는다는 건 무리를 해야 가능해 보였다. 과거 DSLR을 폰카처럼 들고 다니며 찍어대던 사람들에 대해 재력뿐 아니라 악력까지 대단했다며 감탄했다. 카메라를 만지는 내내 와이프의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또 조금 흥미를 가지다 창고행이 될 것이란 걸 직감하는 듯했다. 이미 내 마음도 그럴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대학시절, 염원했던 희망이 지금에서야 이루어진 것에 감격할 뿐이다.


중고란 원래 그런 거 같다. 과거에 머물러 있던 희망을 끌어내 다시금 열망을 불어넣어 준다. 지금은 필요 없거나 잊고 싶은 애물단지를 처분할 기회도 준다. 그것도 금전적으로 보상해 주니 얼마나 좋은가. 물론 단점도 있다. 타인에 미니멀에 찬조만 하고 고철만 가져오는 경우도 더러 있었으니까. 이것 또한 중고의 묘미 같다. 새것 같은 제품을 얻기 위한 나름의 보는 눈을 가지는 과정이랄까. 무엇보다 헐값에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가져와 슥슥 몇 번 닦았더니 새것과 같을 때 그렇게 좋더라. 비용 대한 포만감이 더 크게 다가온다.


영원한 새것은 없다. 사는 순간 중고가 되는 것처럼. 잠깐에 욕망만 누르고 타협하면 얼마든 좋은 제품을 싸게 가질 수 있다. 무엇을 하든 진입하기도, 내려놓기도 좋은 시기가 지금이 아닐까. 어쩌면 내가 이번을 계기로 사진 찍는 취미를 가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뭐 쓰다 안되면 헐값에 팔면 그만이니까. 나이 사십이 되어도 당근에 손을 뗄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배터리 충전기가 작동하지 않았다. 결국 로켓 같은 배송으로 한번 더 주문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자처한다. 새것이 아닌 제품에 걸맞기 위해 반품 이력이 있는 제품으로 골랐다. 중고 제품이 그렇지라는 말을 인정하면서도, 다음을 위한 당근을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하는 셈이다. 덜 죄책감 가지기 위한 나름의 방어기제 같다.


이 글을 쓰면서도 혼자 많이 시시덕거렸다. 너무 궁상맞은 글 같아서다. 뭐 어떤가. 부끄럽지 않다. 새것으로 와서 중고 같은 몸으로 매일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글 쓰다 말고 다시금 당근을 열어 다. 노트북 판매 알람이 와있어서다. 누군가의 손때를 내 손때로 지워나갈 생각에 혼자 미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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