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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비 그리고 바람
Nov 02. 2024
얼마 전 마술쇼를 보고 왔다.
집 근처 도서관이 새로 개장한다. 홍보에 일환으로 하는 행사였다.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의 마술사지만, 서울 근방에서는 꽤나 유명한 듯했다. 산타클로스에 대한 존재를 아직 믿고 있는 딸아이. 그 아이에게는 오래전부터 마술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덩달아 동물도 좋아했다. 마술에 동물이 나오면 이름을 불러도 대답할 수 없는 몽환에 놓이는 듯했다
마술, 나에게는 그저 막연함에 대상이다. 오즈에 마법사에 나오는 깡통로봇과 도로시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88 올림픽 굴렁쇠 굴리던 시절에 유년기를 보낸 나는 마술에 대한 진위를 구별할 능력조차 없었다. 실제로 본 적도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마술이라 해봐야 4개밖에 없는 방송사에서 특집으로 구성하지 않으면 볼 기회가 없었다. 유리겔러가 숟가락 구부리거나 만리장성 통과하는 걸 티브이에서 본 게 전부. 이미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 접해본 마술은 신기하다 보다 삐딱함이 앞섰다. 많이 접해보지 못한 유년기에 대한 분통 같기도 하다.
‘마술은 눈속임이다’를 알고나서부터다. 마술 그대로를 보지 않으려 한다. 말 그대로 ‘쇼’니까 ‘쇼’처럼 보면 될 텐데. 그저 어떻게 속일지 수법을 간파하려 했다. 비둘기 숨길만한 장소를 의심하고, 요술상자라 칭하는 곳 어딘가에 있을법한 전자장치를 예상했다. 공연으로 마술을 보고 온 날은 머리가 핑 돌기도 했다. 틀린 그림 찾기와 숨은 그림 찾기 반나절 한 기분이다. 현상과 원인을 찾느라 다음 코너를 얼빠진 채로 봐야 하는 경우도 다반사. 트릭을 하나라도 알아내는 날에는 호들갑 떠느라 정신이 없었다. 많이 접해본 사람인 척하고 싶었던 걸까?
요즘은 마술쇼를 즐겨 보려 한다. 아이가 좋아해서 나도 노력 중이다. 크지 않은 소도시에 축제행사 중 마술쇼는 없는지 물색하곤 했다. 아직도 딸아이가 두 손 모으고 마술을 감상하던 눈망울이 잊히지 않는다. 신기함과 상상을 넘어선 자신의 미래까지 몽땅 팔아버릴 듯한 표정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에서 나의 과거를 본다. 동심 가득한 눈으로 즐기지 못했던 마법에 신비를 지금에서야 완연히 느끼고 싶다. 딸아이가 좋아하는 모습으로 대리만족 하는 것일지도. 작지만 반짝이는 눈망울 속 렌즈로 세상을 응시하고 싶다.
아이 손을 잡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은 도보로 5분 거리. 저기 멀리 카페 같은 하얀색 3층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세련된 신축 건물에서 자주 관찰되는 반듯함과 유려한 곡선이 한껏 어우러져 있다. 1층 로비에 들어서자 새 건물에서만 맡을 수 있는 페인트 냄새와 지하실 습한 냄새가 동시에 났다. 새로움을 암시하는 냄새는 불쾌하지만 새것이라는 점에서 묘한 설렘을 준다. 앞으로 자주 올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불쾌함 대신 두근거림으로 첫인상을 정리했다. 정면에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평소 같았으면 기다렸다가 탔을 텐데 비상계단을 선택했다. 4명보다 더 좋은 자리에 앉기 위한 나름에 요령이었다. 2층 공연장으로 가는 계단은 무척 조용했다. 2층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궁금했다.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는 중이다. 아이 팔이 거의 들리다시피 올라갔다. 사실 들떠있는 쪽은 아이가 아니고 바로 나였던 것 같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들어오는 시끌함에 놀랐다. 카페에서 듣는 어른들의 잡담소리는 아니었다. 까르르 넘어가며 웃는 소리와 비명과 좋아 죽음 경계점에서 고래고래 질러대는 아이들 특유의 높은음이 대부분. 동글동글한 파스텔톤 의자와 앙증맞은 테이블이 무척 잘 어울리는 소리라며 혼자 웃음 지었다. 아무래도 소형 도서관이다 보니 아이들의 취향을 더 존중한듯한 분위기다. 우리는 10분 일찍 왔음에도 거의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딸아이는 동그란 눈으로 아이들의 쥐어짜는듯한 깨방정을 관찰 중이다. 기분 좋으면 저럴 수도 있음에 놀라는 눈치다.
잠시 후 시끄럽지만 흥겨운 팝송이 흘러나온다. 폰을 보다 까무러치게 놀랐지만 소리가 커서 그런지 부끄럽지는 않았다. 마술쇼는 무조건 소리가 커야 한다는 규정이라도 있는 걸까? 오감이 무작위로 뒤섞이며 현실감각을 잊어야 하기에 그럴 만도 하다며 혼자 속삭였다.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마술사가 등장했다. 슈트가 조금 커 보였지만 주렁주렁 달려있는 반짝이는 그 무언가가 허전함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카드 꺼내 부채처럼 펼쳐 보였다. 카드 마술에 시작을 알리는 행위였다. 카드는 양손을 번갈아 분주하게 거쳐갔다. 아무것도 없던 손에 카드가 나타났고 카드가 들려있던 손에 카드가 사라졌다. 흔한 마술임에도 입은 절로 벌어졌다. ‘와~’ 스스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이도 내 품에 안겨 종알종알하며 중이다. 서로 눈 마주치지 않으며 감탄사를 주고받는 법을 배운 듯했다.
한참을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바로 옆 테이블에서 카랑카랑한 여자 아이 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자 안에 카드 숨겨뒀겠네~ 모자 안을 먼저 보여주고 해야지”
환호와 박수, 음악과 마술사의 행동만 존재하는 세상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돌아보고 싶었지만 바로 옆 테이블이라 볼 수 없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보는 것 같았으니까. 대신 다른 이들이 날리는 눈총으로 대리만족 했다. 다시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마술사에 안위가 궁금했다. 그는 역시 베테랑인 듯했다. 익숙하다는 듯 미소를 날리며 턱을 살짝 지켜 들었다. ‘난 그 정도로 끄떡없어, 왜냐하면 난 마술사니까’라는 말을 하려는 듯했다.
다시 마술에 집중하는 데 또 그 아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더 컸다. 따가운 눈총이 오히려 자신에 대한 대단함으로 해석한 듯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한두 번이야 그럴 수 있겠지 했다. 아무도 제지하지 않으니 그 아이에 도발은 점차 커져갔다. 나는 슬쩍 옆을 봤다. 초등학교 3~4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둘이 앉아 있었다. 한 아이가 안경을 각지게 추켜 올리는 모습이 여간 깐깐한 성격이 아닌 듯 보였다. 옆에 같이 온 여자 아이는 좌불안석. 말리고 싶었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천장을 응시 중이다.
나는 딸아이에 귀를 막고 싶었다. 아이도 그 언니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듣지 않는 척했다. 산타가 없다는 말을 놀이터에서 건너 들었음에도 믿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나에게 묻고 싶었음이 분명했다. 저 언니 말이 진심이냐고. 몇 번이고 내 눈을 보면서도 말하지 못했다. 마술은 눈속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자신이 알고 있던 세상에 머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궁금했다. 마술이 끝나고 나오면서 딸아이에게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때로는 무관심이 관심보다 나은 경우도 있으니까.
공연을 보고 나오면서도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좋은 공연을 보고서도 망친듯한 기분이 든다. 딸아이는 오늘 마술쇼를 만족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속임수라는 것을 알고 한없이 침울해하고 있으면서 티를 내지 않는 것일까? 아이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말없이 걷기만 했다. 미안한 마음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빠가 젤리 사주까? 그거 원반 젤리~”
“쪼아”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젤리에 홀린 표정을 짓는다. 내 마음도 같이 녹는다. 속으로 혼자 중얼였다. ‘그래 머 언제 가는 알게 될 텐데 오히려 잘된 것 같다.’ 스스로 알아가며 새로운 세상을 벗어나기도 하고 다시 들어가기도 하는 거라며 낄낄 댄다. 나는 딸아이 손을 잡고 마트로 끌었다. 와중에 뜬금없이 드는 생각에 다시 어깨가 처지고 만다.
‘그럼 산타가 없다는 건 어떻게 말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