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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 비 그리고 바람 Oct 05. 2024

글감이 없는데

 큰일이다. 쓸거리가 없다.

창작의 고통이 쓰면서 느끼는 괴로움이라면, 글감 찾기에 고통은 쓰기를 마음먹은 후 나타나는 고통이다. 뭐라도 써야 했다. 쓰지 않으면 머릿속 곳곳을 헤집고 다니며 쓸까 말까만 반복해야 했으니까. 이유 없는 분주함은 공허함만 안겨줄 뿐이다.


처음 글 쓰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는 창작에 고통만 있었다. 되려 쓸거리가 많아 고민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안 쓰던 사람이 쓰기를 결정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글감이 머릿속을 스쳤을까. 어떻게 보면 글에도 초심자의 행운이 적용되는 것 같다. 처음 쓸 때만큼은 글감 걱정 없이 써내 간다. 지금은 잘 안다.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앞으로 겪어야 할 고난과 역경 말이다. 과거로 돌아가 나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그때가 좋을 때라고 마음 단디 먹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토록 원하는 글쓰기를 계속하고 싶다면.


좋은 글감이 따로 있나? 요즘 내가 느끼는 의구심 중 하나다. 좋은 글에는 반드시 좋은 글감이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은 처음부터 있었다. 완성했다고 생각한 글인데 볼 때마다 고칠게 보였다. 어떨 때는 더 읽고 고쳐야 하는 줄 알면서도, 지친 마음에 발행을 누르기도 했다. 그때마다 혼자 중얼였다.


‘이번 글은 역시 글감이 별로야.’


그럼 좋은 글감이면 다 좋은 글이 나오는가?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나에게 좋은 글감이란 전개와 결론을 연결시키기 좋은 주제다. 간혹 정말 좋은 글감이라며 아껴서 쓰는 경우가 있다. 이걸로 쓰면 뚝딱 글 한편 완성이라며 피날레로 남겨둔 경우다. 막상 이런 글감으로 글을 써도 좋은 글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더 평이한 글만 나왔다. 도입부터 전개, 결말까지 마음먹은 대로 이어 갈 수 있어도 뻔한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예측 가능한 결말로 몰아가는 글은 재미없는 글이다. 그 과정이야 어찌 됐든 중요치 않다. 표현이 맛깔나고, 묘사가 훌륭하더라도 ‘결론은 이거야’라는 느낌이 들면 더 이상 읽고 싶지 않다. 내 글이 딱 그 짝이다. 결론을 알고 쓰면 재미가 없다. 필력도 부족하거니와 독자와 밀당을 잘하지 못하는 나는, 처음부터 다 퍼주고 만다. 순수한 아이들이 감정을 감추지 못하듯, 글 잘 못쓰는 나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가진 패를 미리 보여주는 꼴이다.


글감에 덜 시달리고 싶다. 새로운 요령이 생겼다. 삶에 변곡점이나 요철을 감각하는 기준을 낮춰 잡는다. 꼭 쓸거리가 있어야지만 쓴다는 생각을 버린다. 현재를 즐기고 찰나에 감각을 최대치로 활용한다. 그러면 꼭 이 주제로 써야겠다는 생각보다, 이 주제로 한번 시도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론은 중요치 않다. 겪은 일이라고 해서 꼭 결론을 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다음에 같은 일을 또 겪더라도 상황에 따라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게 결말 아니겠는가. 찰나에 감정에만 집중하면 된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을 덜하면, 뒤에도 술술 풀릴 확률이 높다. 끝맺음은 나도 모른다. 글이 가고 활자가 불어나는 여정 자체를 즐긴다. 자기 개발서를 쓰는 게 아니다. 이렇게 해라, 하면 안 된다를 말하지 않는다. 그냥 내 이야기를 최대한 나답게 표현할 뿐이다. 특별한 이야기를 특별하게만 쓸려고 하면 오히려 독이 된다. 비슷한 경험을 해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DNA나 뇌 과학 논문처럼 들릴 수도 있다.


공감은 특별함에서 오는 게 아니라 평범함에서 나온다. 남들도 겪어본 이야기가 공감에 지점을 만든다. 단지 고민해야 할 점이 있다면, 평범한 이야기를 평범하지 않고 자기만의 시선으로 엮는 거다. 자기를 드러내고 시선을 보여주면 고유한 문체가 만들어진다. 앞으로 계속 쓰더라도 비슷한 시선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쓸 수 있다. 글에서만 국한되는 사실은 아니다. 문체는 글을 넘어 내 삶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결국 나는 글에서 본 적 있는 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글도 글감이 없다며 투정 부릴 때 쓴 글이다. 글감 없음이 오히려 글감이 되기도 한다. 평소 말하고 싶었지만 경우가 없어하지 못했던 말에 물꼬가 트였다. 한 사람의 시선이 타인에게 전염되는 상상을 한다. 그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공감한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니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음을 보여줄 수 있어 좋은 것 같다. 그것이 글쓰기에 본질이고 쓰고자 하는 이유 같다.


오늘은 글 쓰다 말고 애써 딴짓 중이다. 딸아이 공부방 침대에 누워 아이 공부하는 모습 관찰 중이다. 집중 못하고 쫑알쫑알, 옹알옹알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어느새 내 옆에 앉아 동화책을 읽고 있다. 책을 읽는 딸아이 목소리가 음소거된 듯 멍하다. 아이의 긴 머리칼 사이로 형광등 빛이 부서져 내린다. 눈이라도 감아야 할 듯한 눈부심이다. 어두운 창 밖으로 시원한 바람이 커튼을 밀며 들어온다. 여름이 아닌듯한 감각에 마음이 포근하다. 그 무엇도 할 수 있고 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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