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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 비 그리고 바람 Sep 28. 2024

나에게는 거미줄이 있다

 “거미줄 참 야무지게 쳤네”

대청소하며 만난 그만에 세상이다. 천장 램프 사이로 작은 거미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다. 아무도 없고 심지어 벌레도 없는 이곳에 웬일일까? 어떻게 이곳으로 왔고, 얼마동안 있었는지 궁금했다.


오랜만에 대청소를 했다. 이미 정리된 짐도 꺼내 배치를 다시 한다. 더 이상 쓸모없는 물건을 골라 대형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역시 묵혀두었던 근심 털어내기에 청소만큼 좋은 건 없는 것 같다. 집이 더러워 청소하는 게 아니라,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청소를 했다. 그 주기가 더러워질 시기에 묘하게 잘 맞아 잘 관리된 집처럼 보일뿐이다.


창고 정리 중, 천장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거미줄이다. 곤충은 싫어하지만 거미는 예외다. 오히려 좋아한다는 말이 맞을 정도. 징그러운 외모 같아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귀여운 구석이 있다. 유년시절부터 거미는 익충이라 죽이면 안 된다는 소리를 듣고 자란 영향도 큰 것 같다. 번데기와 거미만큼은 곤충이 아닐 거라며 애써 긍정했던 기억이 소록소록 피어났다.


거미줄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이미 작은 하나의 우주다. 전형적인 거미줄 패턴에 간격과 굵기마저도 일정하다. 미물에게서 이렇게 신기한 능력이 있냐며 감탄 중이다. 그 이면에는 측은함도 같이 만져진다. 벽 모서리를 봤더니 엉성한 거미줄 몇 개가 더 쳐져 있다. 채집과 식사를 했다고 하기에 너무 깨끗했다. 날벌레는 고사하고 먼지 하나 없다. 몇 번에 시도와 실패, 그리고 다시 고심하며 쳤을 흔적들이다. 천장 구석구석을 유심히 살폈다. 새끼손톱만 한 거미가 램프 밑에서 숨죽이고 있다.


거미의 표정까지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지쳐 있었음이 분명하다. 모든 희망을 쏟아부은 마지막 그물에 실망하던 찰나였겠지. 주저 없이 손을 가져가 거미줄을 휘저었다. 당장 내쫓겠다는 생각보다 그의 희망이 헛되이 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거미는 적잖게 놀랐던 것 같다. 실을 뽑으며 도망가기 바빴다. 몸과 연결된 실 때문에 잡힐 수밖에 없는 운명 같다. 낚싯줄 감아올리듯 팔을 돌리며 당겼다. 거미를 팔뚝에 올리고 유심히 봤다. 그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나를 노려 보는 듯했다. 따가운 시선이 부담스럽다. 내 마음 몰라주는 것 같아 괜히 더 서운하다. 서둘러 베란다 창문을 열고 밖으로 팔을 내밀었다. 마침 불어온 바람에 실려 실과 함께 살포시 날아갔다.


어쩌다 이런 곳에 거미줄을 치게 된 것일까? 거미가 가진 겹눈으로 보는 세상은 어땠을지 상상해 봤다.


다른 거미처럼 실을 뽑아 그물을 쳤다. 하염없이 기다렸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잘못 친 것 같아 다시 치고 또 치고를 반복했다. 죽도록 노력했음에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한숨을 얼마나 쉬었던지 이제 말도 나오지 않는다. 다시금 생각해 본다. 실패는 성공에 어머니란 말을 떠올린다. 좀 더 촘촘하게 쳐야겠다 다짐한다. 마지막이 될 거라는 것을 직감한다. 이제는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불과 30센티 밖에는 창문이 있었다. 그곳으로만 나가도 벌레를 잡을 수 있다. 그냥 끈적한 실만 대충 쳐놔도 재수 없는 벌레를 재수 좋게 잡을 수 있었을 거다. 그는 왜 그곳에서만 힘들게 거미줄을 치고 있었을까? 30센티만 옮겨도 기적이 있었는데. 창문은 닫혀 있었지만, 창틀에 작게나마 뚫린 물구멍이 있었기에 탈출이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어떻게든 주어진 환경에서 성공하고 싶었겠지. 자신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만들어낸 극복기를 써내려 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피식 웃음이 인다. 거미의 어리석음 때문도 있지만, 나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서다. 나도 마찬가지다. 비슷한 곳에서 비슷한 일로 살아간다. 비슷한 이유로 아파하고, 비슷한 이유로 좋아하기도 한다. 돈에 울고 웃으면서도 더 나은 삶을 위해 돈돈돈 한다. 사는 거 힘들다며 허구한 날 불평만 했다. 따지고 보면 거미보다 못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시도도 하지 않고 불평만 하고 있으니 말이다.


무엇이든 시도해 보는 삶을 상상해 본다. 지금보다야 바쁘겠지만 더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결국 거미는 나를 만났다. 그리고 더 나은 곳을 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세바시 공연을 다니며 풍요롭게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분명 그 거미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계속 거미줄 치다 보니 나에 주의를 끌 수 있었으니까. 어쩌면 거미줄은 생존에 수단이기도 하면서 생존을 위한 유의미한 시도 같기도 하다.


나는 무얼 더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 나에게도 거미줄이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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