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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 비 그리고 바람 Sep 18. 2024

다 이유가 있겠지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직장에도 있고 친구 중에도 있다. 그중 직장에 한 사람을 유독 싫어하는데 정도가 심한 편이다. 요즘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조차 싫을 정도. 사실 그가 나를 괴롭힌다거나 해를 가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싫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에도 이유가 없듯 싫음에 대한 이유도 없는 게 아닐까.


과거 사건이 있었다. 몇 년 전, 내가 준비하던 과제가 있었다. 팀 전체 방향성을 수립하는 과제다 보니 내용은 결코 쉽지 않았다. 가설을 세우고 근거를 모았다. 발로 직접 뛰며 자료도 만들었다. 내용이 어려워 순탄치 않았지만 더디지는 않았다. 차곡차곡 준비하던 중 그가 우리 팀으로 왔다. 같은 회사지만, 정책상 방향이 맞지 않아 그의 팀이 와해되었다고. 팀원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나보다 한 살 위. 내가 먼저 인사했다. 나는 이런 과제도 하고 있다며 소개에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악을 쓰며 울어대던 매미도 그리운 가을이 찾아왔다. 그가 갑자기 밥을 사준단다. 평소 지갑을 잘 열지 않는 그였다. 고개를 갸웃했다. 뜬금없는 호의에 좋으면서도 찝찝했다. 어렸을 때 듣던 부모님 말씀이 떠올랐다. “맛있는 거 사준다고 절대 아무나 따라가면 안 된다.” 따라갈지 말지 많이도 생각했다.


미심쩍은 기운을 가진 사람치고는 너무 잘 먹었다. 먹는 도중 그가 말을 건넸다. 앞으로 부탁할 일이 있는데 해줄 수 있느냐고. 일단 맛있는 것부터 사주고 부탁해야 할 것 같아서 데리고 나왔단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서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던 터다.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과제하는 거야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무심히 던진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 뒤로 여러 번 도움을 요청했다. 제품도 만들고 테스트도 했다. 밥 한 끼 얻어먹은 거 치고는 과한 보답임은 분명했다. 적응을 돕는다며 밑지는 장사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며 봉사활동을 자처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과제와 성격이 비슷하다는 걸 알았다. 그에게 물었다. 혹시 어떤 과제고 목적이 무어냐고. 따지듯 묻지 않으려 몇 번이고 검열 후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끝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검토 중이라 아직 말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그의 과제 발표날. 발표 대상에 나는 없었다. 그날따라 불안한 기운이 엄습했다. 설마 하는 마음이 조바심으로 커져갔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내 촉은 똥촉이지만 간혹 맞는 날도 있다며 불안함을 드러냈다. 알아야 했다. 우선 그가 발표한 자료부터 구했다. 파일을 여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내가 준비한 과제 그대로 가져가 자기 이름으로 발표한 것이다. 최종 검증만 자기 방식으로 바꿨다. 화가 나야 하는데 어이없는 웃음만 났다. 분노도 정도가 넘어서면 헛웃음이 나올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를 찾아갔다. 씩씩거리며 오는 내 모습을 보고는 먼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듯했다. 보고 있으면서도 안 보는 척하는 걸 보면. 나는 따지듯 물었다. 주변에 다른 동료들이 많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왜 내 과제를 말도 없이 가져가 발표했냐고, 이거 준비하느라 6개월을 보냈다 했다. 그는 머뭇거렸다. 그의 얼굴을 보자 이번에는 제대로 된 화가 치밀었다. 주변에 이상한 시선이 없었다면 눈이 돌아가 멱살이라도 잡았을지 모를 일이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내 발표내용을 어떻게 알지? 네가 준비하던 과제였어?”

“아 미안~”

“하,,,,,, 진짜”


깊은 한숨과 짧은 탄식이 번갈아 나왔다. 모든 진심을 추궁하며 절정을 치닫던 찰나 갑자기 물을 끼얹었다. 내 과제를 몰랐다며 미안하단다. 생각보다 빠른 사과에 기침을 하다만 듯한 기분이다. 사과를 받기 전 보다 더 약이 올랐다. 내가 무슨 과제하는지 그가 모를 일 없었으니까. 뻔뻔한 오리발이지만 더 화를 낼 수 없는 상황. 일단 진정부터 했다. 거꾸로 솟구치던 피가 다시 발 끝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주변을 의식하며 상황을 살폈다.


‘사과를 했음에도 화를 내는 건 옳지 않아. 오히려 그의 의도일지 몰라’ 누가 말해준 것도 아닌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렇게 마음먹으니 억울했던 마음은 점차 안정을 찾아간다. 저려오던 팔다리에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화가 풀리자 서릿발보다 더 냉랭한 기운이 들어찬다. ‘잘된 일인지도 몰라, 비싼 돈 안 들이고 그의 진심을 알게 되었으니’


나는 몇 번의 심호흡만 남긴 채 그 자리를 떴다. 주변이 웅성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모든 사람을 불러가며 자초지종을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오해를 해도 그만이다. 어쩌면 나보다 그들이 먼저 알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내게 자료를 넘겨준 그 사람도 그런 의도에서 보여준 게 아니었을까.


시간이 제법 흐른 지금, 그와의 대화는 아직도 어색하다. 일적으로 하는 대화는 얼마든지 환영이다. 하지만 사적인 말을 꺼내는 순간 나는 자리를 피해버린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포커페이스까지 써가며 태연할 이유는 없는 거니까. 배려도 사람을 가리며 나오는 마음에 일종이니까. 감정이 마음으로만 반응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좋은 경험 같다.


오히려 홀가분하다. 앞으로 갚아야 할 빛이 모조리 탕감된 기분이다. 그것도 모르고 마음을 더 줬으면 어쩔 뻔했냐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분명 그는 싫지만 나 잘되라고 몸소 악역을 자처한 그의 연기력에 감사할 따름이다. 사람이 본디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며 혼자 중얼인다.


“그래 다 이유가 있었겠지. 꼭 그래야만 하는 상황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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