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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비 그리고 바람
Sep 13. 2024
글에 대한 집착이 심해진다.
책을 읽어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문장을 읽다 보면 호흡이 걸리는 곳이 있다. 어려운 단어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음률이 어긋나서 그런 경우가 많다. 산문인데 무슨 음률인가 할 수 있다. 모르는 소리다. 비문학 글에도 분명 음률이란 게 존재한다. 그런 음률 때문에 잘 읽히는 글이 될 수도 있고, 눈만 뻑뻑한 글이 될 수도 있는 거다. 언제부턴가 그런 음률이 보이기 시작한다.
책을 읽다 말고 느닷없이 펜을 든다. 주저 없이 밑줄 긋고 고치기를 시도한다. 문장을 박제하고 주어를 옮기고 부사를 뺀다. 필요 없는 문장은 싹을 자른다. 단어를 들고 다니며 더 나은 문장으로 고친다. 저자가 원래 쓰고자 했던 의미에 가까워졌다는 확신이 들고나서야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수 있다.
요즘 독서를 해도 펜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읽기와 쓰기는 분명 다른 영역인데 떼어 놓고 보면 그 반대가 하고 싶다. 글 쓸 때는 한쪽 모니터에 책을 펴 놓고 힐끔힐끔 보기도 하고, 책을 읽는다 하면 글 쓰듯 펜을 드는 통에 산만하기 그지없다. 하나만 하자며 몇 번이고 다그쳐 봤지만 소용없다. 욕심은 항상 반대편 떡이 더 먹음직스럽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눈치다. 인간관계는 오지랖 없이 잘 지내는 편인데, 글에 대해서는 왜 이리 간섭하고 싶은 걸까. 식탐이 크다는 말처럼 나에게는 글탐이 크게 작용하는구나 한다.
글, 참 징글징글하면서도 매혹적인 단어다. 한국인에게 있다는 ‘정’처럼 오만가지 감정이 얼기설기 엮여 있다. 마음속 깊은 감정을 시원하게 긁어줄 때는 은인 같다가도, 쓰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잘 안 써지는 날에는 원수같이 다가오기도 한다. 꼭 삶에 다사다난함을 혼자 다 짊어지고 가는듯한 단어다. 강렬하지만 절제된 표현을 한다는 점에서 말과 다르다. 글만에 또 다른 깊은 맛이 있다. 내가 글을 끊을 수 없는 이유다.
쓰기와 읽기에 경계가 없어지고 나서부터다.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생각에 흐름이 ‘신경 씀’이라는 장치를 거치지 않아도 나올 수 있었다. 글을 쓴다는 행위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만큼 고통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쓴다라는 말 보다 생각을 ‘툭’ 하고 내려놓는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 안 써지는 날에는 안 써지는 만큼 쓰고, 잘 써지는 날에는 한껏 쓰기도 했다. 쓰면서도 못쓰면 어쩌지를 걱정하던 날이 점차 줄어갔다.
골프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힘을 빼는데만 3년이 걸린다고. 비단 골프에만 유효한 말은 아닌 것 같다. 나도 3년간 매일 쓰면서 못쓰는 기이한 체험을 하고 났더니 이 말이 이해가 간다. 힘이 빠진다고 해서 흐물거리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글을 쓴다는 게 아니다. 힘을 빼야 하는 곳과 줘야 하는 것을 안 다는 거다. 같은 1천 자를 써도 피로도가 다르다. 하루 2천, 3천 자를 써도 거뜬하다. 오히려 누군가와 한참 수다 떨고 집에 가는 기분이다. 피로보다는 홀가분 함이 더 컸다.
글을 보면 개선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억지로 보고 고치겠다가 아니다. 그냥 보였다. 횡단보도 건너편 보이는 현수막 문구에 거슬리고, 지하철 안 촘촘하게 박혀있는 광고글에 어색함이 보이기 시작했다. 귀신이라도 보는 사람처럼 한 곳을 응시하는 힘이 생겼다. 나도 모르게 발현되는 그 힘은 무의식에 뿌리를 두는 것 같다. 스스로 하고 말고에 대해 제어가 불가능한 것을 보면.
활자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틀어보는 능력이 싫지만은 않다. 바쁘게 살아가는 삶에서도 글이 들어찬 틈새를 알아차린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나름의 세상을 헤집고 다닌다. 몰입하지 않아도, 몰입한다는 감각 없이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어쩌면 축복일지 모른다. 매일 그 정도가 갱신되는 잡념과 쓰레기 같은 일들이 내뿜는 중력을 거스를 수 있으니까. 생각 속에 묻힌 감각의 결을 하나로 맞추는 기분이다.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도 크게 벗어남이 없다. 점점 수렴하는 기운을 알아차린다.
오늘은 책을 읽다 말고 아얘 대놓고 글 쓰는 중이다. 책에서 말하는 지식의 포근함과 활자가 속삭이는 달달함에 매료되지 않을 방도가 없다. 내일은 또 어떤 방법으로 땡땡이를 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