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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비 그리고 바람
Sep 22. 2024
무언가에 홀린 사람 같다.
일을 해도 집중을 할 수 없다. 정리해서 메일 보내고, 잠시 후 또 메일을 보냈다. 두 시간이 지난 후 에야 다시 보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같은 메일인지 묻는 전화가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갔겠지. 내가 이 정도로 정신없을 줄이야. 도대체 내 머릿속은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일까?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머릿속은 숨쉬기와 심장 뛰기 말고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불현듯 석 달 전 일이 머릿속을 스친다. 당시 3일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설쳤던 기억이 있다. 뻑뻑하고 무거운 눈꺼풀에 비해 너무나 요란했던 기억들. 어두운 곳에 잠들지 못한 채 뒤척이고 있으면 심장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지금이 딱 그 짝이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잠도 쉽게 이루지 못한다. 분명 기분 나빠야 하는 게 정상인데 오히려 안심이 된다. 무슨 상황인지 생각해 봤다. 감각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라도 익숙하면 순응하게 되는 것일까? 고통에 대해 체념으로 일관하면 이렇게 된다며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 같다. 별일 아니라며 위로받는 기분이다.
‘그래 너 또 왔구나, 오랜만이다’
사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정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말이다. 요즘 라즈베리파이에 푹 빠져 산다. 라즈베리파이라고 해서 먹는 건 아니고 소형 컴퓨터로 코딩을 해서 직접 동작할 수 있는 작은 모듈이라 보면 된다. 하드웨어 엔지니어가 어쩌다 보니 코딩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호기심에 못 이겨 여기까지 온 것이다.
새로운 시도 뒤에는 언제나 고통이 따랐다. 등산도, 글쓰기도, 운동도 마찬가지. 뭐 하나 쉬운 게 없다. 과정에는 수많은 장벽을 만난다. 높이에 좌절하면서도 시도는 계속했다. 나 죽고 너 죽자가 아니다. 단지 저 벽을 넘으면 어떤 세상이 있을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그 세상에 닿을 수만 있다면 당장에 겪고 있는 108 번뇌 중 하나라도 줄일 수 있을 것에 대한 확신도 있었다.
고통 없는 희열은 없다. 그런 게 있다면 약물이나 환각제뿐이겠지. 신기루 같은 희열을 희열이라 할 수 있을까? 그냥 뇌만 망가질 뿐이다. 좋음만 있는 세상에 미래는 없다. 절실함 뒤에는 고통이 따랐고, 그 뒤에는 항상 무언가가 나타나 나를 감싸 주었다. 지금까지 잘해왔다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며 다독여 주었다. 여태껏 받았던 고통은 온 데 간 데 없다. 등산을 왜 하냐고 하면서도 정상에 올랐을 때의 시원함을 기억한다. 단지 땀을 식혀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은 아니었다. 산더미처럼 커 보이던 세상이 발아래 납작하게 깔려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분노가 식으며 단단한 자신감으로 바뀌는 기이한 체험을 할 수 있었으니까.
나이 먹을수록 안이함에 안도하는 것 같다. 사는 게 힘이 부치니 하던 일이나 제대로 하자 한다. 새로움은 고통이고 극복은 젊어서 했어야 한다며 지금에 안주하려 한다. 아니 도피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건 당연한 욕망이다. 당연함과 쉬움만 쫓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다. 사십이 되면 감각적인 느낌이 이성을 압도하기도 하니까. 내가 마냥 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미 내 몸은 알고 있는 눈치다. 어쩌면 고통을 더 쫓고 있을지도. 당장에 고통보다 좀 더 멀리 보고 싶다. 조금만 시선을 달리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저기 멀리, 아득히 멀어서 보이지도 않는 곳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본다. 또 호기심이 발동한다. 답을 찾는 과정에서 좌절하고 실망도 하겠지. 그것도 그때뿐이다. 또 살아가겠다 하면 살아지는 게 인생 아니겠는가. 이과생이라 글을 쓸 수 없고, 하드웨어 엔지니어라고 코딩을 못하는 게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