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눈 비 그리고 바람
Sep 01. 2024
여행 중독이다.
얼마 전 광복절 연휴에 여행을 다녀왔다. 피서는 아니고, 고즈넉한 한옥이 즐비한 곳. 시원한 곳이라고는 박물관이 전부인 그곳에 다녀왔다.
갔다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가고 싶다. 그때의 푸르름과 자연에 코 박고 마신 풀내음이 아직도 아른거린다. 티 나지 않은 단아함과 생색내지 않는 나지막함이 주는 여운이 이렇게나 짙었다니. 취한다는 말은 꼭 알코올의 스밈에만 쓰는 것은 아닌가 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이지만 이런 여행 한 번이면 또 살아갈 이유를 찾곤 한다.
나는 특히 사람으로 북적이지 않는 곳을 좋아한다. 자연과 어우러진 현대 문물이면 더할 나위 없다. 이곳에 우리만 있다는 생각은 없던 틈에도 여유가 생긴다. 딱딱한 아스팔트를 벗어나 흙과 자갈을 흩뿌린 길을 걷는다. 걸을 때 전달되는 감각에 그저 마음은 살갑다. 적당한 딱딱함과 와그작 밟히며 땅을 미는 감각은 살아있음을 실감 나게 한다.
오늘 더 이상에 여정은 없다. 여름인 만큼 땅거미가 내려앉는 속도 또한 더뎠다. 하루에 대한 여유는 충만하다. ‘아무것도 할 게 없음’이 이렇게나 좋은 거였나? 순간 머릿속을 가득 매우던 열감이 빠지는 기분이다. 풍선에 바람 빠지듯 몸에 힘이 빠진다. 무더운 열기만큼이나 나른하다. 의무와 책임만 가득한 내 마음도 여유란 게 들어찰 수 있구나.
여행이 필요한 이유다. 무엇도 해야 한다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로 치환하는 매력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은 무능이 아니다. 삶에 대한 게으름이 아니고 방관이 아니다. 경직된 삶을 치유하는 하나의 방법 중 하나다. 여행은 자기만의 방법으로 위로한다.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비밀인 양 귓불을 간지럽힌다.
여행은 쉼에 대한 나의 표현법이자 존중이다. 무심코 던지는 누군가의 위로보다 여행에서 얻는 적막함이 백배 좋다. 아무 말하지 않고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저 그렇게 시간을 때워도 차분함과 포근함에는 차이가 없음을.
갑자기 비가 온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우왕좌왕한다. 얼른 뛰어가 숙소에 가야 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머리 위 부터 등줄기로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느껴진다. 그간 쌓아 두었던 걱정과 괴로움이 씻기는 기분이다. 머리에 김이나며 식는 기분이다. 탈모가 오면 어쩌지 하다가, 이런 기분 못 느끼고 죽으면 억울하지 했다. 물방울만 요란한 어느 휴일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