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일은 참 얄궂다.
밑 빠진 독에 물 붇는 것 같아도 쓰고 싶다는 열망이 피어나는 까닭이 무엇일까? 막연함은 아닌 거 같고 그렇다고 구체적인 동기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목표가 코앞인데 출구를 찾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함, 여기까지 왔는데 그만둘 수 없다는 아쉬움이 교차한다. 언젠가 후회할지 모를 그날이 싫어 그냥 써내려 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쓰기는 매번 나에게 무엇이든 주고 싶어 했다. 오늘 하루 고생했다 같은 안도, 내일도 해볼 수 있겠다 같은 의지를 한 소쿰 쥐어주었다. 손사래 치며 달아나고 있음에도 어떻게든 쫓아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꼬깃한 종이를 든 채 한참을 멍하게 서있었다. 싫음과 부담스러움도 반복하다 보면 어떤 방식으로든 나아진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글을) 쓰다, (맛이) 쓰다, 같은 단어처럼 보여도 쓰임이 완전 다른 동사다. 언제부턴가 두 단어가 비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글에는 요행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나서부터다. 아무리 써도 쓴맛은 줄어들지 않는다. 이제는 오히려 신맛과 떫은맛까지 느껴야 할 판이다. 쓰다는 동사는 동음이의어지만 어쩌면 세종대왕이 비슷한 감각을 동원한다는 이유로 동음으로 묶은 건 아닐지 의구심이 든다. 글쓰기를 좋아했던 그가 느꼈을 감각을 상상해 본다. 정말 그런 의도일지 모른다며 소름 돋기도 한다.
몸에 좋은 약은 쓰다. 나이 사십이 되고 나니 손등에 문신으로 새기고 싶은 문장이다. 고리타분한 꼰대 같은 말 같아도 세상 모든 진리를 품고 있다. ‘달다’ 말 그대로 달콤해서 당장에 하고 싶은 무엇이다. 현실에 미래와 과거를 제외한 나머지 값이다. 돈을 쓰거나 설탕을 삼키거나, 몸이 원하는 도파민을 뿜는 행위다. 그저 소비하는 삶이 여기에 해당한다. 결국에는 과도한 소비로 고갈되거나 망가질 것임이 분명하다.
쓴 맛은 어떨까. 가장 먼저 건강이 떠오른다. 얼마 전에도 비슷한 글을 썼다. 일부러 멀리 주차하고 걷는다거나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는다거나 글을 쓰는 행위. 빨리 갈 수 있고 몸이 편한 길이 있음에도 돌아가려 한다. 몸이 시킨 일은 아니다. 미래를 위해 의지가 시킨 일이다. 엄마 잔소리처럼 어떻게든 몸에 이롭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지금도 휴일 아침 글을 쓰고 있다. 티브이를 보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욕망이 얼마든지 있음에도. 고통을 쌓는 일이 생산하는 일임을 알고 있으니까.
억지로 하던 일에 명분이 쌓이면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 고통이 차곡차곡과 같은 말로 천이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복리로 쌓이기 시작한다. 선순환이 주는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다. 마라톤 선수가 뛰다 보면 겪게 되는 러너스하이 같은 단계가 있다. 근육이 늘어지고 비틀어지는 고통을 감내하면 환각제 같은 순간이 온다는 거다. 글에도 분명 이런 단계가 있다고 본다. 쓰기에 쓴맛을 느끼다 보면 언젠가는 자기 글을 통해 해방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쓴다는 행위가 무척이나 쓰다. 생산하는 삶이라 할지라도 그 량이 극히 적다. 포만감을 느끼지 못할 수준. 그렇지만 나에게는 믿음이 있다. 소비하는 삶보다는 적게나마 생산하는 자가 좋을 것이라는 믿음, 지천명에 나이가 되면 그 약효가 서서히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믿음 말이다. 힘듦, 고난, 고통, 하기 싫음도 꾸준함 앞에서는 쓰디쓴 약을 달이는 과정 일 뿐이다.
어쩌면 쓰기로 가는 여정에는 고통만 가득할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계속 쓸 것 같다. 쓰다 보면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빌미로 어떻게든 계속 쓰겠지. 이쯤 되니 몸에 좋은 약이 쓰다에 '쓰다'는 맛을 표현하는 동사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고쳐 쓰면 어떨까? 몸에 좋기 때문에 쓴다라고. 글 쓰는 이유를 꼭 만들어야 한다면 이렇게 끄적인 뒤 머리맡에 붙여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