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염에 걸렸다.
아침부터 복통에 시달리더니, 저녁이 되자 오한도 왔다. 뜻밖에 두 귀한 손님의 방문에 어쩔 줄 몰랐다. 배에서는 천둥소리가 났고, 입에서는 연신 꺽꺽대며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조금 비위가 상할 수 있겠지만 화장실에서도 모든 액체와 기체를 뽑아내기 바빴다. 며칠 전 생굴을 먹던 모습이 떠올랐다. 촉촉한 식감만큼이나 바다향 물씬 풍기던 순간이었지.
코로나 이후 이보다 아팠던 기억은 없었던 것 같다. 아픔은 아픔에 대한 기억에 촉매제가 되는 것일까? 과거 아팠던 기억만 모조리 끄집어냈다. 유년시절 볼걸이, 수두, 군대에서 했던 수술, 허리디스크 터졌던 일까지. 모조리 끄집어내 진열 중이다. 서로 자기가 더 아팠다며 아우성이다. 순간 ‘그래서 어쩌라고!’ 빽 소리를 질렀다. 정말 지른 것은 아니고 내 속에 있는 ‘고통이’들에게 지른 것이다. 화를 내자 다시 두통이 끼어들어 모든 생각을 무마했다. 이럴 바에는 모든 장기를 다시 끄집어내 깨끗이 씻은 다음 바위에 말린 후 다시 넣고 싶은 심정이다.
불과 1년 전에도 비슷한 기억이 있었다. 허리 디스크 터졌을 때 일이다. 디스크가 터지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에 몸부림쳤다. 허리 위로 트랙터가 지나가는 듯한 통점이 온몸을 짓이겼다. 고통을 몇 달간 생생하게 받아내면 몸은 알아서 기억을 만들고 반응했다. 밤새 끙끙 앓으면서도 나 사용설명서를 바꾸고 고치는 듯 보였다. 아직 수정한 원문을 볼 수 없었지만, 평소 누렸던 자유가 제한될 거라는 사실 정도는 분명했다. 의사나 엄마가 내 머릿속에 한 명 더 들어앉은 기분이다. 다리를 꼬고 앉으면 허리에 안 좋아, 따듯한 물을 자주 마셔야지, 오래 앉아 있었는데 스테레칭 한번 하지. 이런 말이 스스로 생겨났다. 간혹 귀찮다는 이유로 듣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마다 모래시계가 떠올랐다. 허리 통점 같은 모래알이 아래로 떨어지며 차곡차곡 쌓이는 모습을 상상했다. 잔소리를 전복하기 위한 모의는 결국 여기서 끝나고 만다.
그날 저녁 8시, 대뜸 침대에 누웠다. 온수매트 후끈하게 올리고 일찍 잘 요량이었다. 24년 마지막날까지 출근해야 한다며 툴툴댔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다. 어디선가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 사태 파악을 위해서였다. 알고 보니 배꼽에서 여전히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뱃고동(?) 소리에 놀라 눈을 뜬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밤사이 화장실을 드나들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서둘러 출근 준비를 했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 차를 몰았다. 그날 아침, 한적한 사무실 분위기와 다르게 두통과 오한의 재방문이 있었다. 결국 병원에 갔다. 의사가 귀에 온도계를 푹 쑤시더니 말했다.
“다행이에요, 열은 없네요. 열이 나면 골치 아프거든요. 오늘은 약 드시고 죽 같은 거 챙겨드시면 금방 나을 거예요. 연말이라고 아무거나 막 먹으면 안 돼요”
기분이 묘했다. 묘한 기분인데 다행이라는 것과 감사하다는 생각만 또렷했다. 스스로 자책하면서도 다독였다. 비록 장염이긴 해도 열이 안 나서 다행이고, 마침 연말이라 병원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의사 선생님께 연신 감사하다며 인사를 했다. 별일 아니라는 안도 때문인지 앞으로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 때문인지 모를 인사였다. 병원을 나오면서 간호사에게도 감사의 목례는 빼먹지 않았다. 건물을 나서자 찬 공기가 맞바람에 실려 훅 하고 들어왔다. 콧구멍에 골고루 들어찬 찬 기운이 머리까지 올라가는 기분이다. 덕분에 차가움 보다는 상쾌함이 앞서는 듯했다.
약국에 들러 약을 샀다. 덩달아 비타에 숫자가 들어간 드링크도 한 박스 샀다. 우리 회사 정문 지킴이로 계신 보안실 아저씨들이 떠올라서다. 나이도 아버지 나이대와 비슷하다. 매일 죽을상으로 출근해서 인사를 드려도 항상 아빠 미소로 화답 주셨다. 출근 이점 중 몇 안되는 장점을 담당하는 고마우신 분들이다. 오늘은 아파서 병원을 가야겠다 했더니 얼른 가보라 했다. 원래는 외출 절차가 있는데 그냥 나를 밀어내다시피 밖으로 보내셨다. 하얗게 질려버린 내 얼굴을 보고 걱정이 앞서는 듯했다.
회사 정문에 들어서며 감사인사를 했다. 수줍게 드링크를 건네는데 안 드시면 어쩌지 하며 조마조마했다. 손사래를 치시면서도 아빠미소를 얼굴에 잔뜩 묻히고 계셨다. 확신이 들었다. 무조건 받아야 한다며 손사래를 내리고 박스를 품 안에 안겨 드렸다. 돌려받지 않겠다는 의지로 획 하고 돌아섰다. 종종걸음으로 가는데 그분이 잘 먹겠다며 소리치셨다. 찬 바람이 볼을 스쳤다. 갑자기 불어서인지 차가움 때문인지 눈앞이 흐릿했다. 분명 따스함에 겨운 수분임이 분명했다. 비록 6천 원 밖에 안된다는 사실에 부끄럽기도 했다.
사무실 계단을 오르며 중얼였다. 내가 장염이 아니었다면, 오늘 출근하지 못했다면 이런 기분을 겪을 수 있었을까? 의사에게, 간호사에게, 보안실 아저씨들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기회가 있었을까? 한결 마음이 홀가분했다. 출근해서 감사했고 적절한 타이밍에 몸에 수분을 앗아간 생굴에게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