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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구백팔십삼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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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 비 그리고 바람

나는 1983년생이다.

앞에 19를 붙이면서 그리고 83을 연달아 쓰면서도 어색할 때가 있다. 20세기말에 태어난 사실이 이제는 당연하지만은 않다. 누가 볼까 조심스럽기까지 하다. OTT 서비스나 흔한 홈페이지 회원 가입을 하려 하면 생년을 넣어야 하는데 한참 동안 숫자를 올리고 또 올려야 했다. 내 나이가 이렇게나 먹어버렸나 탄식하곤 했다. 한때는 산소학번 ― 02학번을 O2에 빗대어 표현 ―이라고 우쭐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나는 88 서울 올림픽 때 잔디밭을 누비던 굴렁쇠 소년을 보았으며 화염병과 총탄으로 얼룩진 민주화 운동의 잔재도 보았다. 또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대한항공 KAL기 폭파사건 현장을 생방송으로 보기도 했다. 지금 말하면 겪지 못한 세대들의 반응에 김 빠지곤 한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궁금한 표정을 짓는 게 아니라, 옅은 콧방귀와 함께 꼰대라느니, 아제개그나 치는 아저씨를 보는 표정으로 중열이 곤 했던 것 같다.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나이를 먹으면 세상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 같다. 자신만의 기준이 생기니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기 때문인 듯했다. 볼혹의 나이가 되어보니 정말 그런 기준이 생기긴 했다. 세월에 닻을 내리고 천천히 주변을 음미하는 기분은 생각보다 포근하면서도 보드라웠다. 그렇지만 자주 그러진 못했다. 세월의 속도는 내가 정해둔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스스로의 기준을 정하고 닻을 내리는 순간 이미 한참 달아나 버렸다. 오히려 우리에게 적응을 강요하고 있었고 그렇지 못할 시에는 도태와 같은 형벌을 내리려 했다. 꼭 자신만의 보폭으로 걷는 사람이 없어야 하는 것처럼. 이런 세태에 불안해하지 않기 위해 이렇게 글로 남긴다.


나에게 있어 세상의 기준은 요즘이 아니다. 오늘은 그저 과거 어느 날의 아득한 미래일 뿐이다. 또한 그날을 나누는 기준은 장소가 아니라 시절이었다. 초-중을 ― 사실 난 국민학생이었다 ― 경험한 80년대와 90년대 초반인 듯하다. 아직도 그때의 감성과 행복감에 충분히 젖은 채 살 수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꼭 말로 표현하고 음미해야 할 필요도 없었다. 단지 가슴속에만 품어두어도 충분했다. 마치 클라우드 시스템이 유년시절만 비과금으로 유지하고 현재를 과금으로 유도하는 상술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근래에도 충분히 좋았지만 난 왜 항상 과거 속에 정겨움만 떠올리는 것일까?


요즘에는 조금 불안한 기운이 든다. 과거를 조금씩 꺼내보고 다시 닫아두던 그때가 희미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덕순이가 나오고 성나정이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고서 생생히 떠올리려 해서 그런 것 일 수도 있다. 잊히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던 순간이 아쉬웠다. 문득 추억 드라마를 보며 나도 모르게 정지 버튼을 눌렀다. 아직도 행복과 슬픔을 과거 그때의 가족 사이에서 있었던 추억을 떠올리는 것을 보면 나에게 과거는 절대 잊힐 수도 잊히게 둘 수도 없는 것 같다. 다시 과거로 회귀는 할 수 없다. 드라마나 책을 보고서 회상은 할 수 있어도 현실처럼 살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아쉽다. 그래서 이렇게 글로 끄적이려 한다. 나에게는 소설처럼 극적이고 다큐멘터리처럼 웅장했던 일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그림일기처럼 느낄지도 모르겠다.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는다. 나만의 보폭이 때로는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확하리만큼 같은 생각의 주파수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과거는 절대 혼자만의 생각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거다. 그들도 같이 있었고 동조하였기 때문에 지난날의 추억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니까. 꼰대나 아재라는 이유로 그들의 이야기가 묻힌다면 너무 아까울 것 같다. 비록 디지털로 재현된 생생한 모습은 아니더라도 그들에게는 꿈이 있었고, 그걸 이룰 만큼이 열정이 있었다. 그 여정에 만났던 고난은 말할 것도 없겠지. 또한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끈기와 지혜가 있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어디서든 유효한 통찰을 무수히 품고 있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보았거나, 전쟁통을 겪은 부모의 부모를 통해 들을 수 있었던 삶에 진심까지. 이 모든 이야기는 과거에만 묶여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단지 꼰대라는 말로 위축된 그들에게 마이크를 쥐어주고 싶다. 아날로그에도 배울 점은 얼마든지 있다. 40년 이상을 살아온 이들에게는 반평생이라는 노하우가 있다. 카네기의 관계론과 같은 이야기를 저마다 각색하여 들고 있을 것이고, 칼세이건의 코스모스 같은 전문성을 지닌 책도 여러 권 품고 있을 것이다. 그들을 불러내자. 각각의 이야기보따리를 불어 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고전은 아직도 읽히고 있다. 몇 천년이 지나도 아직 재미있거나 유익한 내용들이 많다. 과거 사람은 꼰대고 고리타분하다면서 고전은 왜 읽히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고전에 담긴 이야기가 흥미와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해서가 아닐까.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고전이 있다. 비록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잊힐까 두려웠던 이야기를 여기서 풀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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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