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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 비 그리고 바람 Jun 18. 2022

누군가를 험담한다는 것은

소중한 당신

 누군가를 험담하는 사람, 그리고 누군가에 험담을 들어주는 사람, 누가 더 힘들까?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문득 이런 고민도 하게 된다.


사실 나는 불과 5년 전만 해도 험담을 하는 사람에 더 가까웠다. 대화를 하다 보면 자리에도 없는 누군가가 주인공이 되어야만 했다. 그 주인공은 심판대에 서서는 해명할 기회조차 박탈 당한채, 아무런 증거도 없는 만행에 가해자라도 된 듯 우리에 판결만을 기다릴 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이야기만 해도 충분히 건강한 대화가 될 수 있음에도, 누군가에 담화를 하지 않으면 대화에 대한 몰입이 되지 않는 듯 아쉬움마저 남았다. 그때는 그게 유일한 낙이었던 그런 때가 있었다.


직장생활이라는 것을 하다 보니, 소파에만 누워 계시던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직장이라는 곳은 어떤 곳이고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어린 마음에 무척이나 궁금하기도 했었다. 이제야 직장이라는 곳에 궁금증이 풀리기 시작한다. 소파에 드러누울 수밖에 없는 내 모습을 보며 말이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모의고사,,, 고사만 지내다가 졸업한 학창 시절이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었다사실을 알기까지, 이렇게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만 했음에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일과 집, 주말에 잠깐에 휴식, 그리고 다시 일과 집이 반복되는 삶 속에서 자기 발전을 위한 노력은 사치에 불과했고 잠시 동안 주어지는 여유는 몸을 가만히 뉘이는데 쓸 수밖에 없었다. 나이를 먹는 것과 체중이 불어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나는 자연스럽게 자존감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세상에 부조리를 외치듯 잘 나가는 사람에 대한 험담이 위안이 되긴 했나 보다. 자신이 올라갈 수 없으면 남을 내리면 되는 것처럼,,, 그렇게 속시원히 험담하고 돌아서도 남는 것은 찝찝함과 후회밖에 없더라. 자신 있게 걷어 찰 수 있는 것은 길거리 조그마한 돌 뿐이던 그런 나날들로 하루하루 채워갔던 그런 때도 있었다.


하지만 살다 보니 인생은 누구보다 잘났고 못났고를 따지며 살아야 하는 상대 평가가 아니더라. 누구보다 잘나야지만, 돈이 많아야지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나은 직장, 더 나은 집, 더 나은 차를 가져도 봤지만 눈높이만 더 높아질 뿐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나에 허기를 채워 줄 수 있는 것은 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수많은 이들에게 아픔을 들춰내어 끼니를 때웠다는 사실에 부끄럽기만 했다.


시간이 없음은 핑계이고, 힘들어서 못한다는 것은 자기 안심을 위한 변명이었을 뿐, 자신을 채우고 높이는 것은 멀리 있지 않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운동, 독서, 글쓰기도 사실 따지고 보면 자존감 회복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을 채우기 위함이다. 수십 년간 살아오며 터지고, 깨지고, 잘려나간 나에 일부가 오롯이 나로 인해 채워지고 있다고 할까?


지금은 누군가를 만날 시간도, 대화할 시간도 모자란다. 나를 채우면 채울수록 마음에 단단함을 느끼며 말은 하는 것이 아니라 들어주는 것에 더 큰 매력느끼고 있는 중이다. 대화중에 누군가에 험담을 듣게 될 때면 거북함과 피곤함이 밀려오더라. 그간 내가 했던 행동이 잘 못되었음을 벌주려는 것처럼,,,


아마도 그 누군가를 험담하고 있는 이 사람은 예전에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측은한 마음마저 든다.


다른 감정은 없다. 그리곤 화제를 돌려보며 그의 실망감 속에 깨우침이 있기를 조심스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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