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위한 커피를 만든다는 것.
내게 이 행위는 꽤 오래전에 형성된 각별한 취미라 할 수 있다.
이제 막 혼자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게 된 시절, 나는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누군가를 위해 커피를 끓였다.
커피포트가 없었던 터라 주전자에 물을 올린 다음, 김이 오르기를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인스턴트커피 세 숟갈만 담은 이 커피는 나의 어머니를 위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블랙커피를 좋아했다.
그게 멋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때로는 우유와 올리고당을 조금 넣는 걸 좋아했는데, 그럴 때면 나의 일요일 오전은 무척 평화롭게 흘러갔다.
디즈니만화부터 동물농장, 신기한 TV 서프라이즈까지 반나절 내내 티브이 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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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면서 한동안은 커피를 내리지 않았다. 커피를 마실 줄 몰랐던 나를 위해서도, 거리감이 다분 느껴지게 된 어머니를 위해서도 커피를 내릴 일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스무 살이 되어서야 다시금 커피를 만들 기회를 맞았다. 2010년대 초반의 일이다.
그때는 이상하게도 카페 아르바이트에 대한 환상이 컸다. 다른 아르바이트에 비해 따뜻하고 시원하면서도 뭔가 있어 보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당시만 해도 나는 카페에 가서 커피를 주문하는 걸 꽤 어려워했는데, 발음하기도 어려운 단어들이 즐비한 메뉴판이 유독 두려웠던 탓이다.
괜히 이름을 잘못 말하면 어쩌나 하는 초조함과 함께 종류-사이즈-토핑 등 정해야 할 게 너무도 많아 보였다.
그래서 친구들이 조금씩 입대를 하기 시작하던 대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카페 아르바이트를 해보기로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커피와 친해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했던 것 같다.
나는 이틀에 한 번씩 이른 오후마다 구워야 했던 아몬드 냄새를 특히 좋아했다. 영화관의 팝콘 냄새만큼이나 포근하면서도 몽글하게 느껴졌다.
덕분에 커피와 조금은 수월하게 친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랜차이즈 카페에서는 잘 팔리는 메뉴에 집중해야 했고, 결과적으로는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팥빙수를 만드는 일이 훨씬 많았다.
그럼에도 나는 커피를 즐길 수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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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커피를 내리게 된 건 조금 더 지나서의 일이다. 이십 대 중반에 자취를 하면서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자주 가던 카페를 뒤로 한 채 전동 그라인더와 모카포트를 온라인에서 구입했다.
이것저것 비교하다 보니 가격이 제법 나가는 제품들로 사게 됐던 것 같다. 이때 산 전동 그라인더는 다행히 지금도 잘 쓰고 있다.
그렇게 나는 매일 아침마다 나를 위한 커피를 만들게 됐다.
원두를 계량해서 그라인더에 넣고, 적정량의 물을 모카포트 보일러에 넣은 다음 가스레인지를 켰다. 원두를 갈 때의 향긋함과 에스프레소가 치익 소리를 낼 때의 은은함이 온 집안에 가득 퍼졌다.
커피를 내리는 건 의외로 설거지까지 해야 하는 꽤 손이 가는 작업이었지만, 한동안은 원두도 이것저것 사보고, 나름의 커피 일지까지 써보며 재미를 붙였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이 나의 집을 방문할 때면 언제나 정성스럽게 내린 커피를 함께 나누었다. 향긋하고 은은한 공기 둘러싸인 시간이 유독 좋았던 것 같다. 뭔가 소중한 것을 정성스럽게 대접할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했다.
오래 전의 어린 뿌듯함과는 다소 결이 다른, 지극히 나와 상대가 주인공인 시간이 문득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는 실감을 했던 것 같다.
요즘은 그렇지 않은 듯하지만, 커피는 원래 어른들의 전유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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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나는 다시금 스스로를 위해 커피를 내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이를 먹으면서 달라진 게 있다면 스스로를 위한 커피도 꽤 즐길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조금 번거롭더라도 나를 위한 커피로 시작한 하루는 질적인 면에서 무척 다르다고 믿고 있다. 일단 하루를 무척 잘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분이 드는 것부터가 정말 큰 차이다.
뭐든 시작이 좋으면 경과도 나쁘지 않은 법이니까.
이른 오후에 또 한잔의 커피를 연달아 마시며, 꽤 오래전에 써두었던 커피에 관한 글을 마친다.
혹시 마음이 지치는 날이 있다면 나를 위한 커피를 한번 타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