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은, 지금부터 부지런히 평생을 읽는다 해도 그리 많은 책을 읽을 순 없으리라는 생각에 절망에 빠진다. 그러면서도 번번이 책을 놓고 시간을 흘려보낸다. 인간이란 사실 그런 존재다.
나는 말보다 글을 선호하는 편이다. 상대에게 전하기 전에 충분히 가다듬을 수 있어 좋다는 핑계를 댄다. 글은 고칠수록 나아지고 시간은 나의 편이라는 착각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끝없이 인내하며 퇴고할 용기가 없고, 그 퇴고의 수준도 내가 알고 있는 영역 내에서나 가능한 법이다. 인간이란 게 사실 정말 그렇다.
영원히 살 것처럼 만용을 부리지만, 실은 제 생이 언제 다할지 조금도 알지 못한다. 당장이라도 죽지 않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단지 다른 짐승들과는 달리 그 예측 가능성이 조금 높을 뿐이다.
이렇게 여러모로 불확실한 게 인생이라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미리 구분하고 규정짓는 게 과연 필요한 걸까. 하룻강아지처럼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막 덤비다 보면, 타고난 수준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닐까. 물론 하나의 알을 깨고 나가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말이다. 더욱이 강아지는 결코 범이 될 순 없다. 강아지는 끝내 개인 것이다.
이토록 많은 제약을 가진 것이 인간이지만, 성장하면서 그들은 더 많은 한계를 스스로 지으며 살아간다. 도전, 이라는 낭만적인 말은 핑크빛 짙은 안갯속에 깊이 묻어둘 뿐이다. 혹여나 또 다른 내가 찾아내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한계 덕분에 우리가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닐까는 생각도 든다. 이건 이래서 할 수 없고 저건 저래서 할 수 없어, 하고 미리 단정해 놓으면 이번 생에서의 내 생활 반경은 분명해진다.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못하는 일이 물과 기름처럼 명백히 구분된다.
나는 그저 그 안에서만 잘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조차도 너무 넓은 것 같으면 또다시 펜스를 치면 된다. 어차피 닿을 수 없을 저 울타리 밖은 생각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내가 살아가지 않을 22세기나 저 멀리 해왕성 안에서 벌어지는 일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할 수 있는데, 하지 못한다는 것만큼 가슴 아픈 일도 또 없을 테니까.
옛 선비들의 덕목인 안분지족(安分知足)이나 요즘도 흔히 쓰는 네 주제를 알아라, 그러다 가랑이 찢어진다, 같은 말들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걸지도 모른다. 울타리는 분명 내 가능성을 제한하기도 하지만, 한정된 내 삶을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안전장치이기도 하다.
하룻강아지는 그저 주인집 담장 안에서만 얌전히 잘 살아가면 될 일이다. 담장 밖의 일 따위는 다른 누군가에게 맡겨 두면 될 일이지 않은가.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은 거니까. 설령 누군가가 그 담장을 위협하는 일이 생긴다 해도 말이다.
※ 위 포스트는 논객닷컴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