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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션 SEAN Sep 15. 2020

[칼럼] 인간의 한계는 누가 짓는가

가끔씩은, 지금부터 부지런히 평생을 읽는다 해도 그리 많은 책을 읽을 순 없으리라는 생각에 절망에 빠진다. 그러면서도 번번이 책을 놓고 시간을 흘려보낸다. 인간이란 사실 그런 존재다.


나는 말보다 글을 선호하는 편이다. 상대에게 전하기 전에 충분히 가다듬을 수 있어 좋다는 핑계를 댄다. 글은 고칠수록 나아지고 시간은 나의 편이라는 착각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끝없이 인내하며 퇴고할 용기가 없고, 그 퇴고의 수준도 내가 알고 있는 영역 내에서나 가능한 법이다. 인간이란 게 사실 정말 그렇다.


영원히 살 것처럼 만용을 부리지만, 실은 제 생이 언제 다할지 조금도 알지 못한다. 당장이라도 죽지 않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단지 다른 짐승들과는 달리 그 예측 가능성이 조금 높을 뿐이다.


이렇게 여러모로 불확실한 게 인생이라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미리 구분하고 규정짓는 게 과연 필요한 걸까. 하룻강아지처럼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막 덤비다 보면, 타고난 수준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닐까. 물론 하나의 알을 깨고 나가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말이다. 더욱이 강아지는 결코 범이 될 순 없다. 강아지는 끝내 개인 것이다.


이토록 많은 제약을 가진 것이 인간이지만, 성장하면서 그들은 더 많은 한계를 스스로 지으며 살아간다. 도전, 이라는 낭만적인 말은 핑크빛 짙은 안갯속에 깊이 묻어둘 뿐이다. 혹여나 또 다른 내가 찾아내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한계 덕분에 우리가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닐까는 생각도 든다. 이건 이래서 할 수 없고 저건 저래서 할 수 없어, 하고 미리 단정해 놓으면 이번 생에서의 내 생활 반경은 분명해진다.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못하는 일이 물과 기름처럼 명백히 구분된다.


나는 그저 그 안에서만 잘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조차도 너무 넓은 것 같으면 또다시 펜스를 치면 된다. 어차피 닿을 수 없을 저 울타리 밖은 생각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내가 살아가지 않을 22세기나 저 멀리 해왕성 안에서 벌어지는 일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할 수 있는데, 하지 못한다는 것만큼 가슴 아픈 일도 또 없을 테니까.

옛 선비들의 덕목인 안분지족(安分知足)이나 요즘도 흔히 쓰는 네 주제를 알아라, 그러다 가랑이 찢어진다, 같은 말들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걸지도 모른다. 울타리는 분명 내 가능성을 제한하기도 하지만, 한정된 내 삶을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안전장치이기도 하다.


하룻강아지는 그저 주인집 담장 안에서만 얌전히  살아가면  일이다. 담장 밖의  따위는 다른 누군가에게 맡겨 두면  일이지 않은가. 그런  따윈 아무래도 좋은 거니까. 설령 누군가가  담장을 위협하는 일이 생긴다 해도 말이다.


※ 위 포스트는 논객닷컴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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