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션 SEAN Sep 25. 2020

[일상]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나는 사촌 형제가 여럿 있다. 나보다 8살이 많은 형부터 14살이나 어린 동생까지. 스펙트럼이 꽤 다양한 편이다. 그래서 세대 차이라고 하기엔 조금 거창하지만 그들과 이야기 나누고 있으면 새롭게 느끼는 점들이 많다.


육아의 고달픔에서 방학숙제의 막막함까지. 주제도 무척 다양하다. 물론 애착이 가는 건 단연 14살, 15살짜리 어린 남매 쪽이다. 아기 때부터 매년 봐왔던 터라 아이가 커간다는 건 이런 걸까는 생각도 든다. 제법 걸걸해진 목소리와 하얗고 빨갛게 잔뜩 칠한 화장을 보고 있으면, 내가 알던 아이들이 얘네가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요즈음이다.


무엇보다 아직은 서른여섯 아저씨의 쓸쓸한 한숨보다는 중2병 아이들의 쉼 없는 재잘거림이 더 좋은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통하는 점들은 몇몇 남아 있다. 그간 머리를 짜내며 지어냈던 각종 이야기들은 김빠진 콜라보다도 더 시시해져 버렸지만, 우리는 여전히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한 번씩 만나는 날이면 마실 것을 사들고 같이 코인 노래방에 간다. 웬일인지 음악 취향까지도 비슷하다. 먼데이키즈와 엠씨더맥스의 신곡을 부르는 아이들을 신기한게 바라보는 나를 비슷한 얼굴들로 올려다본다. 다들 엠씨더맥스가 부른 노래 중에 이런 게 있었어?, 하는 눈치다.


요즘 인터넷을 하다 보면 어딜 가나 남녀 갈등이 만연하다. 별 상관없는 주제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30만 년은 족히 함께 살아왔고 세상의 절반은 남자와 여자인 상황에서, 왜 이토록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지의 실마리를 나는 이 아이들에게서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개인 성향이나 학습여건 등의 여러 변수들이 있겠지만, 중요한 건 얘네가 통제된 실험 대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무척 자유분방한 가정에서 자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영혼들에 가깝다.)

늘 똑같은 환경에서, 성별의 구분조차 무색했던 이 아이들도 이제 사춘기를 지나고 있다. 남자와 여자에 대해 한창 온몸으로 배우고 있다. 그런 이 아이들의 차이는 선택의 상황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우리는 노래를 실컷 부른 다음 근처의 카페로 갔다. 나는 각각에게 뭐 먹을래 하고 물었다. 흥미로웠던 점은 평소에는 활발했던 여자아이보다도, 도리어 소심했던 남자아이 쪽이 먼저 입을 열었다는 것이다. 나는 과일은 싫고, 초코가 좋아, 라고 분명하게 주관을 말한다. 그럼 나는 초코가 들어간 음료들을 하나씩 설명해주면 된다. 어쩌면 더 간단하고, 편리하다.


하지만 여자아이의 머릿속은 이보단 복잡해 보였다. 빙수들도 한번, 케익들도 한번, 찬찬히 모두를 둘러본 다음 가격표를 슬쩍 보며 내 의견을 먼저 묻는다. 오빠는 뭐 먹을 거야? 그러면 나는 더 이상 가성비 좋은 아메리카노 한 잔만 시킬 수 없게 된다. 나는 커피 하나에 허니 브레드를 고른다. 그런 나를 보고서야 안심했다는 듯, 그럼 나 케이크 먹어도 돼? 하고 묻는다. 물론 이 아이는 먹고 싶었던 음료와 케익 모두를 손에 넣게 된다. 내 잔고만이 눈물을 흘릴 뿐이다.


한 살 터울인 이 남매를 보며 여자아이들이 빨리 큰다는 속설이나, 여자아이들이 사회성이 더 좋다는 말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같은 남녀공학학교에 다니고 똑같이 남녀 합반인데도, 여자아이들만 따로 남겨 무슨 방과 후 교육이라도 시키는 걸까. 여자의 생각은 정말 알다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 아이와 나도 얼마 뒤엔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게 되겠지.


나도 어쩔 수 없는 Y의 염색체를 타고났나 보다. 몇 년 후면 같이 노래를 부를 일도 없을 것 같아 그저 슬플 따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상] 원고 투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