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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션 SEAN Sep 28. 2020

[생각] 글을 쓰는 이유

손홍규, 「손홍규의 로그 인」 글을 쓰는 이유 中 / 『경향신문』(2010년 11월 2일 자)

종종 나는 문학청년들이 소설가가 되고 싶다거나 시인이 되고 싶다고 말할 때 설명하기 힘든 씁쓸함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말할 때 어린 학생들의 눈은 순수하기 이를 데 없으며, 그런 소망의 어느 한 부분에서조차 불결함을 느낄 수 없는 데도 말이다. 문학을 특별한 그 무엇으로 여기는 그들의 순수성을 나무랄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소설가나 시인이 되는 게 꿈이어서는 안 된다. 만약 진정으로 문학이 인류의 영혼과 관계하는 특별한 그 무엇이라면 그건 문학이 원래 그러하기 때문이 아니라 특별한 소설과 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굳이 바꿔 말하자면 그런 특별한 소설을 쓰는 것이, 시를 쓰는 것이 꿈이 되어야 한다.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존재의 부분을 찾아내지 않는 소설은 부도덕한 소설이다'라는 밀란 쿤데라의 말과, '자신이 좋은 사람임을 증명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욕망보다 예술에 더 사악한 효과를 미치는 것도 없다'는 필립 로스의 말을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위로받기 위해 글을 쓰거나 글을 읽는다면, 다시 말해 문학에서 위안을 구한다면 문학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자유로워지기 위한 글쓰기와 독서가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값싼 동정과 위로가 하루의 원기회복제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을 통해 우리의 존재 자체를 미적으로 경험할 수는 없다.

만약 이런 주장이 좀 과격하게 여겨져 받아들이기 힘든 분이 있다면, 여전히 문학이란 위로가 되어줄 때 가치가 있다고 믿는 분이 있다면 이렇게 수정해도 좋을 듯하다.


질문 끝에 다가오는 형체 없는 위안들, 그건 이미 그대 안에 있었노라고. 전문. 끝.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래로, 지금껏 수많은 작가들이 바람직한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하지만 여전히 어떠한 결론이 나지 않은 걸 보면, 글쓰기에는 왕도는 없다는 말 정도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입장들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면, 그만큼 작가들이 글을 마주하는 태도가 다채롭다는 데 있다. 우리는 그저 '이 작가는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정도로만 인식하고, 필요한 부분만을 취해 자신의 견해를 형성하는 밑거름으로 삼으면 될 일이다.


이 글을 가져온 이유는 해당 견해에 완전히 동의해서가 아니라, 한 번쯤은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특별한 작품을 쓰겠다는 것을 꿈으로 삼으라는 이 말에는 조금도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작가 본인부터가 특별한 작품을 쓰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그 반대의 입장이다. 어떠한 모양의 동기든 자신만의 이유로, 많은 작품들을 읽고 쓰다 보면 좋은 작품도 만들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위 칼럼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만한 점은, 문학의 무한한 포용력에 너무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다. 누구나처럼 처음엔 문학의 넓은 가슴에 매료되어 접하게 되었을지라도, 어느 순간에 전문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보다 좀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작가는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동안 익숙했던, 형체 없는 위안들과의 이별해야 할 많은 이들을 위해 마지막 문구를 덧붙였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입지를 가진 기성작가로서, 같은 길을 걷고자 하는 문청들을 대상으로 한 말이니만큼, 그렇지 않은 분들은 가볍게 들어도 좋을 듯하다. 이 말이 꼭 정답이 아닐뿐더러, 이조차도 어느 한 개인의 생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 또한 아직은 이 말에 모두 공감할 수 없다. 비극의 체험에서 오는 카타르시스야말로, 문학이 가진 가장 순수한 기능이며, 그러한 위로를 전해주는 일이야말로, 작가가 가진 진정한 의무라고 여전히 믿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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