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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Mar 01. 2020

세상에는 봐야만 하는 피가 있다

오늘도 겁쟁이가 누군가를 구한다



 피를 못 보겠다. 과거에 딱히 큰 트라우마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그냥 못 보겠다. 그래서 피 튀기는 스릴러나 공포 영화는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고(가볼 계획도 없으며), 19세가 넘은 지 한참이지만 가짜 피가 튀기는 청소년 관람불가의 액션물은 나도 관람이 불가하다. 아무래도 내 뇌는 ‘피=끔찍한 일’로 프로그래밍한 것이 분명하다.





 인간의 뇌 속에는 편도체라고 하는 아몬드가 있다고 한다. 이 조그만 아몬드는 공포와 위험을 감지하여, 인간이 위협에 맞서거나 피하는데 도움을 준다. 당신이 누군가의 아몬드를 꺼내 와작 씹어먹는다면 그는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톰에게 맞서는 제리처럼. (사실 제리는 편도체가 제거된 채로 연구실을 탈출한 동물 실험의 최대 피해자일지 모르지.) 물론 만화영화에서야 항상 제리가 톰을 이겼지만, 빨가벗은 인류가 겁 없이 아무 포식자에게 덤볐다면 원시시대에 진작 멸종하지 않았을까? 인류는 앞날의 공포를 감지하고 이미 겪었던 위험을 기억하며, 비슷한 일이 닥쳤을 때 적절한 대처를 통해 자신을 보호해왔다. 많이 과장하자면 ‘겁’ 때문에 인간이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니 피에 대한 나의 공포는 생존하기 위한 신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이 신호를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틀기만 하면 우울하고 머리 아픈 이야기뿐이라며 뉴스를 꺼두고, 유혈이 낭자한 희생의 역사를 골치 아프다는 이유로 냉대하고,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일어나는 잔인한 사건들을 도외시한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지금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일들을 보고 잔인한 잔상이 머릿속에 남아 밤잠을 설치고,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까 무서워서 심장이 툭툭툭, 툭―툭―툭, 툭툭툭 뛰는 게 당연한 거였다. 이건 사실 두려워하고 경계하라고, 너도 사회의 편도체가 되어 제 기능을 하라고 미래의 내가 보내는 SOS 모스부호였던 거지.




 나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피가 무서운 겁쟁이에 불과하다. 이런 내가 다른 대담한 이들처럼 세상의 1열에 서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도 참혹한 슬픔은 한 번이면 충분하기에, 이제는 알아야 하는 고통이 있고 봐야만 하는 피가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겨우 닿을 작은 목소리라도 내고자 용을 써본다.


 어쩌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건, 같은 일로 두 번의 피는 보고 싶지 않은 다수의 겁쟁이들 덕분이 아닐까. 오늘도 그 겁쟁이들의 닿을 듯 말듯한 목소리가 모여 내가 사는 세상을 구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말이다.






글쓴이의 말

책 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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