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왈 : 해나 바람, 너네 둘 다 싫다고요
"예쁘다는 말이 왜 별로야?"
그러게 언제부터 나는 예쁘다는 말이 달갑지 않았을까. 자주 듣는 말도 아닌데, 그 말만 들으면 괜히 할 말이 없어져서는 '아~ 네, 하하하.' 정도의 반응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눈을 피했다. 처음에는 칭찬이 민망해서 그런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다른 좋은 말은 들으면, 광대부터 올라가서는 표정을 숨길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살이 많이 빠졌다.', ' 예뻐졌다.', '귀엽다', '피부가 좋다.', '넌 이런 스타일이 잘 어울린다.' 등등 외면에 대한 칭찬은 들으면 기분이 막 좋지만은 않고, 오히려 묘해진다. 마치 이솝 우화 <해와 바람>의 나그네가 된 기분이다.
모두 알다시피, 이 동화는 바람이 해에게 누가 세상에서 제일 힘이 센지 내기를 하는 내용이다. 대결 종목은 우연히 길을 가는 나그네의 외투를 먼저 벗기는 것. 첫 번째로 바람이 나그네를 향해 입김을 세차게 분다. 그러자 나그네는 외투가 벗겨지지 않도록 옷깃을 더, 꽉 여민다. 반대로 해는 따뜻한 햇살로 나그네를 덥게 만든다. 그래서 나그네가 스스로 외투를 벗으면서, 이 내기는 해가 승리하게 된다. 결국 해의 부드러운 강함이 휘몰아치는 세찬 바람을 이긴다는 이야기. 그런데 사실, 나그네 입장에서는 둘 다 똑같은 놈들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그네를 두고 이래라저래라 경쟁을 하더니, 지들끼리 승자를 정하고 자기가 더 세다고 말한다. 나그네는 벗지 않아도 될 외투를 두 놈의 기싸움 탓에 '어쩔 수 없이' 벗었다. 그럼, 해의 온화함이 나그네를 위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첫 만남에서 아이스 브레이킹을 하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가 외모 칭찬이다. 보이는 외면을 칭찬하는 건, 솔직히 10초도 안 걸린다. 이 사람을 잘 몰라도 내가 생각하는 대로 말하면 된다. 어차피 답은 없고, 칭찬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말한 사람만 알 수 있다. ― 딱히 중요하지도 않고. ― 이 말의 목적은 그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는 거다. 그래, 그래서 문제다. 너무 편하고, 쉬워서. 기준이 없고, 무분별해서. 하지만, 다수가 말한다면 객관적인 기준이 ‘있는 것처럼’ 되어버리니까.
암만 입으로 외모지상주의 타파를 외치고,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주장하더라도, 대중매체와 광고, 그리고 타인이 어떤 이미지에 '미 美'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사회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전형적인 기준이 생긴다. 그 속에서 개인은 칭찬이라는 보기 좋은 포장지를 뒤집어쓴 평가에 휘둘리기 쉽다. 좋은 말인 것 같고, '악의'는 없으니까. 그렇게 자신도 '악의 없이' 남을 제 입맛대로 평가하고, 그 평가가 돌고 돌아 사회에 통용되는 기준을 더 굳건하게 만든다.
잘생겼다. 아름답다. 키가 크다. 날씬하다. 이런 말이 칭찬이 되는 순간, 반대말은 자연스럽게 비난이다. 못생기면 안 되고, 키가 작으면 곤란하고, 마르지 않으면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 외면에 대한 칭찬은 내가 평가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해도, 말에 자신의 판단 기준을 내포하고 있다. 비난받는 걸 즐기는 가학적인 성격이 아니라면, 칭찬을 듣고 나서는 그 말대로 되고 싶어진다. 또 듣고 싶고, 기분이 좋으니까. 해님의 따스함에 나그네가 외투를 벗은 것처럼, 내 기준이 아닌 남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외투를 벗을 생각이 없던 나그네에게는 땀을 뻘뻘 흘리게 하는 햇살이나 한겨울처럼 쌩쌩 부는 바람이나, 둘 다 똑같이 짜증 나는 날씨이지 않았을까. 나는 지금, 내가 원해서 걸친 외투가 마음에 든다. 그래서 몸을 들썩이게 하는 바람이나, 정수리로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이 하나도 반갑지가 않다. 그것이 얼마나 선한 의도이든 나를 자신이 원하는 틀에 짜맞추려 한다면, 내게는 그저 변덕스러운 기상이변에 불과하다.
글쓴이의 말
예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별로 따뜻한 말은 아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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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쓴 <나다운 건 내가 정한다>가 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