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견디고 있습니까
서울의 작은 단칸방에서 자취를 할 때 내 집은 온통 회색이었다. 벽지도 회색, 침구도 회색, 암막커튼까지 회색. 이러니 안 그래도 먼지가 쌓여 퀴퀴한 원룸이 더 암울하게 보였다. 그래. 이 집은 초록이 필요해! 하지만 나는 식물을 길러본 적이 없고 이런 어두운 방에서 곰팡이 말고 다른 게 자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래도 있다면 너무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유난스럽지 않은 작은애였으면 했다. 속 썩이지 않아서 자주 손이 가지 않아도 되는 애. 그냥 이 집에 인테리어로 적합한 애. 그러다가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화초를 자주 죽이는 사람들을 위한 실내용 화초’
자주 죽이는 사람들을 위한? 나 같은 인간군상을 제대로 저격하는 말이었다. 집에 자주 들어오지 않는 사람을 위한 화초와 집이 아주 어둡다면 햇빛이 별로 필요 없는 화초 등을 소개하며 글쓴이는 입문자에게 '키우는 재미'를 화초에서 찾아보라고 말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된다.', '집에 빛이 들지 않아도 된다.'같은 '키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장점들을 어필했다. 거기 놓인 온갖 초록들을 보며 ‘나도 이 중에서 아무거나 골라야겠다.’고 여기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이렇게 기르면 화초들은 사는 걸까 아니면, 견디는 걸까.'
화초는 기르는 사람에게 욕을 하며 따지거나 주먹을 팽팽 휘두르지 않는다. 그러니 다른 애들보다 묵묵히 잘 견디는 착한 아이들에게는 ‘기특하니까 더 좋은 환경을 줄게.’가 아닌, ‘그래? 이것도 견딜 수 있어? 그럼 퀴퀴하고 눅눅한 곳에서 살아.’라며 최악의 환경만 주어진다. 예를 들면 우리 집 같은. 그 생각이 드니 화초 키울 맘이 사라졌다. 사람에게도 못할 짓을 식물에게 할 수는 없었다.
"지금 마시멜로를 먹어도 되지만, 엄마가 다시 올 때까지 먹지 않고 기다리면 하나 더 먹을 수 있게 해 줄게."
여기 이런 못돼먹은 실험이 있었다. 엄마는 아이에게 한 개의 마시멜로를 주고 15분 동안 먹지 않으면 하나를 더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랬더니 단 15% 아이들만 앞에 놓인 마시멜로를 먹지 않은 채 얌전히 기다리며 그 유혹을 견뎌냈다는 이야기. 뭐, 실험의 결론은 이렇다. 15년 뒤에 이 아이들을 다시 찾아가 보니, 순간적인 충동을 참은 아이들은 학업이나 건강, 인간관계, 사회적 위치 등이 마시멜로를 바로 먹어버린 애들보다 월등하게 좋았다고 한다. 이 실험은 만족지연 능력이 높을수록 사회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고, 이건 책과 미디어로 주야장천 나왔다. 그 덕에 2000년대 초반, 인내가 성공의 공식이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절대적인 이론이 되었다. 그런데 최근에서야 이 연구가 허점투성이라고 밝혀졌다. 사실 이 실험은 15년 뒤에 추적할 수 있는 표본이 50명도 안될 만큼 적었으며 실험에 참가한 아이들이 놓인 조건(가정환경, 양육방식, 인종 등등)은 다 달랐기 때문에, 사실 마시멜로 따위와 성공이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다고 말할 순 없다는 거다.
안타까운 건 1990년대 실험이 2018년에서야 엉터리라고 드러난 점이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우리를 속이는 것 같아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믿었고 부당함에 화가 날 때도 일단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전까지는 군말 없이 일하며 인내하라고 배웠다. 하지만 오늘의 마시멜로를 참으라던 놈들은 내일까지 참아도 두 개의 마시멜로는커녕 하나라도 제대로 챙겨준 날이 없었고, 심지어는 그런 약속을 했는지 조차 모르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참아야 할까. 아니. 누구를 위해 참고 있는 걸까. 분명 내가 잘되자고 하는 건데 가끔은 남을 위해 버티는 기분이 든다. 대부분은 오늘의 할 말을 내일로 미루며 묵묵하고 무던하게, 군말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런데 그럴수록 더 볕 들지 않는 곳으로 밀려나는 기분이다. ‘어차피 쟤는 불평불만 없더라고. 그래서 괜찮아.’ 한 달에 한번 목 축일 물만 주면 시키는 대로 잘하더라고. 까탈스럽지 않아서 참 다루기 쉬운 애더라고.
아무것도 견디지 않는 사람은 문제가 있다. 그런데 아무거나 견디는 사람도 문제는 있다. 뿌리에 발이 달려있지 않아서 뛰쳐나갈 수 없는 화초야 억울해도 묵묵히 한 자리에서 참고 산다지만, 입 달리고 발 달린 우리까지 그래야 쓰겠는가. 주변에서는 당신에게 무리한 걸 요구하며 ‘원래 다 그런 거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래 그런 일은 없다. 다수가 불만하지 않고 꾹 참으면 힘든 일도 당연하게 된다. 그러니 세상이 그대를 속인다면 슬퍼하거나 노해야 한다. 누구나 남을 위해 견디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 살아가고 싶으니까. 그게 화초와 다른, 인간을 기르는 법이니까.
글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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