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과 모험의 시대

'비밀기지 만들기'를 읽고

by ㅇㄷㅌㅌ

한여름 밤이 되면 왕눈이형을 따라 모험을 떠나곤 했다.

주공아파트 뒷산에는 온갖 곤충들이 서식했는데 특히 우리는 사슴벌레나 장수하늘소를 주로 찾아다녔다. 개구리 왕눈이처럼 눈이 컸던 왕눈이형은 후레쉬 빛으로 나무기둥 이곳저곳을 비추면서 기가 막히게도 벌레들을 잘 발견했다. 몇 시간을 그렇게 칠흑 같은 산속을 헤매고 나면 각자 사슴벌레 몇 마리쯤은 전리품처럼 가지고 내려오곤 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우리는 각자 잡은 사슴벌레를 들고 비밀기지에 모였다.


오가타 다카히로의 '비밀기지 만들기'를 읽고 그동안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봇물 터지듯 와르르 쏟아졌다.

초등학교 때까지 살았던 시골의 주공아파트 단지는 정말 최고의 놀이터였다. 잔디가 멋지게 심어진 구릉이 단지 옆에 있었고 감자, 고구마, 무, 옥수수 등이 심어진 밭이 야산을 올라가는 중턱에 있었다. 그것들은 이따금 우리들의 비상식량이었다. 야산에 올라가면 버려진 방공호를 개조해서 만든 비밀기지가 있었는데 그 속에서 모닥불을 피워 고구마나 감자를 구워 먹거나 잡아온 사슴벌레들을 꺼내 싸움을 붙이곤 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나의 비밀기지는 해를 거듭하며 여러 차례 바뀌고 진화해갔다. 처음엔 버려진 폐허나 지하 보일러실 같은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었는데 아무래도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엔 아파트 뒤편에 쌓여있던 폐목재를 가지고 그럴듯한 공간을 만들었는데 아무도 못 알아차리도록 은폐하는 방법도 차츰 익혀갔다. 가진건 없었지만 모든 게 가능했고 내일은 또 어떤 멋진 일이 벌어질까 하는 설렘과 행복이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창의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창의력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을 때 발휘되지 않는다. 오히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을 때 처음으로 얼굴을 내민다. 절망에 빠졌을 때야 비로소 친구가 되어준다. 웃음을 잃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을 때 나타나 미소 짓는다.

지금 어른이 된 우리는 비밀기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모두가 갖고 있는 창의력이 숨어버린 것은 아닐까. "

- 비밀기지 만들기 225p


건축가인 작가가 비밀기지에 대해 수년간 인터뷰하고 자료를 수집한 이 책의 구성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눠져 있다.

1. 장소 찾기 2. 비밀기지 만들기 3. 비밀기지에서 하는 놀이 4. 어른들의 비밀기지

요즘은 예전처럼 자연과 어우러져 사는 게 힘들어졌지만 그래도 도시 속에서 건물 틈새나 다리 밑을 활용한 비밀기지 만드는 방법과 실제로 그런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소개되어 있다. 어른이 된 우리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들은 집 없는 노숙자일 수 있지만 수십 년 전의 나라면 아마도 탄성을 지르며 멋진 비밀기지를 가졌다고 부러워할 것이다.


비밀기지 만들기는 전혀 재미없어 보이는 풍경 속에서 적당한 틈새를 찾아내고 그 속에 들어가, 그곳에서 익숙한 일상의 풍경을 조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주변 세상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재구축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에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힘이 아닐까. 이런 힘만 있으면 설령 이 사회의 구조가 무너질 만큼 큰일이 벌어져도 절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밀기지적인 상상력’의 스위치를 켜주는 이야기의 세계는 우리의 인생에서 절대로 떼려야 뗄 수 없다. 236p


현실 속에서 삶의 무게를 느끼며 살아가는 것은 참 힘들 때가 많다. 아니면 너무나도 지리멸렬해서 넋이 나갈 때도 있고. 그럴 때면 우리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현실에서 도피하곤 한다. 그 상상 속에서의 꿈과 희망이 현실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고 믿으니깐. 다만, 우리가 어린 시절 겪고 느꼈던 설렘과 기대, 소소한 행복에 대한 기억이 지문처럼 남아있다면 그 상상은 더욱 멋진 구성으로 전개될 것이다.


위기 상황을 겪어보지 못한 아이들은 실제 위험에 둔감하다. 비밀기지 만들기란 크고 작은 위험을 경험하는 일과 같다. 비밀기지 만들기를 체험을 통해 우리는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소중한 것을 배웠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용기와 지혜를! 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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