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팍에 이어 흥민손까지 역사에 서다
죄송한 말로 축구 사랑은 2002년 전후로 시작되었다. 아마 다수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야구를 사랑하지만 국기라고 부르는 축구란 콘텐츠에 애증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진다. 필자 또한 그러했다. 80~90년대 시절 나도 모르게 현대家의 모든 팀을 응원했다. 단, 아직 창단 전인 현대 대신 오로지 MBC청룡으로 시작한 현재의 엘지까지 한 팀 만을 응원하고 있다.
일단 본론으로 들어가자. 야구 이야기는 언젠가 또 할 일이 오겠거니. 내게 축구란 8~9세 시절 처음-아니 그전부터 공은 갖고 논 것 같다-MBC 푸른 신호등 연예인 축구단 관람이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그 당시 최고로 유명했던 이주일, 이상해 등 당대 인기 코미디언과 기념사진도 찍은 기억 여전히 생생하다. 프로 축구가 시작된 후 울산 현대 호랑이 축구단을 응원했다.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현대자동차 서비스 배구단, 현대전자 농구단 등의 하나 된 팬심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축구에 있어서만은 2002년을 기점으로 연고지 경기도 팀인 수원 블루윙즈를 응원했고 원정 응원마저 따라다니며 그랑블루의 일원으로 함께 했다.
이처럼 마니아는 아니지만 그 축에 들려고 무던히 노력했던 시절이었다. 그럼 70년대생인 필자가 처음 접한 월드컵은 언제인가?! 바로 10회 연속 월드컵 시발점이었던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이었다. 워낙 어린 때라 생방보다 녹화로 경기를 관람했고 고인이 도시인 송재익 캐스터의 샤우팅에 감탄했다. 변병주, 차범근, 최순호 등 그 많던 선수들의 이름이 모두 기억되지 않지만 아르헨티나와의 끈질겼던 경기도 멋진 추억이다. 1992년 이태리 월드컵은 나 스스로도 별났다. 조별 승무패 표를 벽에 붙이고 미술 실력을 뽐내 차트도 디자인했다. 하지만 1990년 이태리 월드컵은 왠지 허탈했던 전적으로 기억된다. 이후 미국 월드컵, 2002에 이르기까지 우린 환호했고 환희했다.
대한민국 축구팬들의 시선은 2002년 이후 세계로 뻗어 나간다. 서영욱 해설 위원이 존경스러웠고, 해외 PL, 분데스리가, 에디 비리지(발음도 어렵다) 리그 등을 한국팬들이 점령한다. 박지성은 그런 신화의 시초이다. 물론 차범근 세대 어른들에겐 죄송하지만 눈에 보이는 만큼 더 잘 보인다고 언성 히어로 박지성의 맨체스터 시절 역할은 끝내줬고, 토트넘 이영표와의 코리안 더비는 전 국민을 열광시켰다. 이 때 서서히 축구화 끈을 조여 매기 시작한 어린 선수가 등장한다. 뭐, 그 이전 이동국, 김두현, 설기현, 조원희 등의 멋진 PL 리거가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했지만 이 어린 신성 1992년의 손흥민을 능가하지 못하리라.
함부르크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내며 아시다시피 레버쿠젠으로 이적, 최종적으로 토트넘으로 이적한다. 사실 토트넘은 예나 지금이나 PL 우승권과는 거리가 있다. 재정적 한계, 구단주의 넓은 혜안 등이 아쉬운 팀이다. 15년 축구 생활 아시안 게임 외에 없던 손흥민. 이렇게 그의 해가 져무나했던 것을 단박에 밀쳐내는 사건이 바로 어제 벌어진 것이다. 챔스 리그보다는 약간 하위 리그지만 세계 축구계 중상위권 그룹으로 묵여진 팀들의 대전에서 최종 우승하게 된다. 영광의 상처까지 얻었다니, 게다가 대한민국 최초 주장 출신의 유로컵 우승임에 더 큰 상징성을 보여준다.
SNS는 손흥민의 우승 축하 소식으로 넘쳐난다. 모두가 자기 일인 듯 기뻐한다. 행복은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있다. 대리만족도 그저 감사와 행복을 전한다. 더구나 태극기를 끝까지 들고뛰며 환호하는 손흥민의 모습에 감사한다. 더 쓸 말이 많겠으나 또 다른 소재감을 위해 여기서 멈춘다. 박지성에서 손흥민으로 이어지는 황금 세대의 재능들. 동시대에 함께 웃고 울며 공감할 수 있음에 감사한 축구라는 장르. 그러해서 우리에겐 축구가 국기라 불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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