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24(토)
드디어 그날이 밝았다. 우리 시윤이가 그토록 기다리고 고대하던 그날이. 어쩌면 진짜 생일보다 오늘을 더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마침 소윤이와 시윤이도 어제보다 몸이 훨씬 나아졌다.
“아빠. 제가 할머니, 할아버지랑 같이 밥 못 먹을까 봐 얼마나 떨렸는데여”
소윤이의 말에서 진한 안도감이 느껴졌다. 지난번 소윤이 생일에는 시윤이가 아파서 나랑 시윤이가 집에 남았었다. 이번에는 그 반대가 될까 봐 걱정했는데 참 다행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어제 받은 레고를 열어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레고는 아빠가 있을 때 할 수 있다는 엄마의 선언에 따라, 오늘이 되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아침에도 늦잠(누누이 말하지만 늦잠도 아니다. 애들이 너무 일찍 일어나는 거다)을 자는 나를 향해
“아, 아빠랑은 주말에만 놀 수 있는데 왜 이렇게 안 일어나시는 거야”
라고 말하며 나의 기상을 기다렸다고 했다. 오늘은 ‘아빠’보다 ‘아빠가 일어나야 할 수 있는 레고’를 더 기다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내가 서윤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사이에 레고를 개봉했다.
“시윤아. 시윤이는 조립하기가 어려울 텐데 괜찮아?”
“네에. 아빠랑 누나가아 하고오 저는 가지고 놀면 되져어”
소윤이는 신이 나서 레고를 조립하기 시작했다. 시윤이는 옆에 앉아서 필요한 블록을 찾아주며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흥겨운 추임새를 넣었다. 방에 들어갔던 아내가 잠시 거실에 나와 소윤이에게 중요한 사실을 얘기해 줬다.
“소윤아. 그런데 시윤이한테 편지 안 써?”
“아 맞다”
주인공인 시윤이보다 더 설레며 레고 앞에 앉았던 소윤이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바로 책상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빠. 다 조립하면 안 돼여. 제가 할 것도 남겨놔야 돼여”
“그럼. 어차피 다 못해”
소윤이는 동생에게 줄 편지를 열심히 쓰기 시작했다. 시윤이는 누나 옆에 가서 자기는 자동차를 좋아하니까 자동차를 그려 달라고 말하며 누나한테 애교를 부렸다.
나는 시윤이와 함께 레고를 조립했다. 한창 소소하게 레고를 모을 때는 조립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이건 아들 장난감이라 그런지 막 엄청 재밌지는 않았다. 하나씩 조립해서 줄 때마다 엄청 좋아하는 시윤이 반응이 더 재밌었다. 편지를 다 쓴 소윤이가 다시 합류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방에서 서윤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시작하기 전에 미리 얘기를 했다. 서윤이가 깨면 레고는 넣어야 한다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쉬워했지만 미련 없이 정리했다. 작은 블록이 서윤이에게 얼마나 위험한지 평소에 하도 들어서 그랬을 거다.
레고를 정리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아내가 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여보. 왔대’
시윤이의 또 다른 생일 선물. 장모님이 사 주신 RC 자동차. 문을 열고 나가서 택배 상자를 가지고 왔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당연히 큰 관심을 보였다. 모르는 척하고 상자를 열었고, 둘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해졌다. 역시나 이번에도 소윤이도 시윤이 못지않게 즐거워했다. 사실 우리 집은 ‘사실상 장난감 구매 폐지국’이다. 있는 장난감도 어떻게든 틈을 봐서 없애려는 판이다. 이러한 정책 방향은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공지된 바이고 ‘손주에게 장난감 사주는 기쁨’을 빼앗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언제나 아쉬워하셨다. 그런 우리 집에 장난감 선물이라니. 순전히 시윤이의 생일 기쁨을 극대화하기 위한 일시적인 해제 조치였다.
시윤이는 무척 좋아했다. 어른들의 마음도 홀리는 게 RC 자동차다. 다섯 살 아이의 마음에는 오죽하랴. 소윤이는 예의가 있었다. 자기도 엄청 하고 싶었을 텐데 동생의 선물이라는 걸 기억하고 절대 선을 넘지 않았다.
“시윤아. 시윤이 충분히 하고 누나도 해 봐도 되지?”
어떨 때는 권력자의 횡포로 무장한 듯하다가도 이럴 때 보면 또 영락없는 누나 같기도 하고. 소윤이는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을 독점한 나에게 끊임없이 확인했다.
“아빠. 우리 집에서 ‘내 꺼’는 없져? 다 같이 하는 거져?”
“음, 그렇긴 하지”
“당연히 시윤이 선물이니까 시윤이가 먼저 하는 거긴 해도 다 같이 할 수 있는 거져?”
“응, 맞아”
둘은 사이좋게 리모컨을 주고받으며 자동차를 조종했다. 부디 이 평화롭고 배려 넘치는 모습이 내가 없는 평일에도 유지되길 바라지만, 아내의 말에 의하면 평일 낮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열받는 상황도 많다고 했다.
잠시 후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도착하셨다. 이미 선물을 보내셨지만 또 양손 가득 소소한 선물을 들고 등장하셨다. 아이 하나를 기르려면 온 마을이 움직인다는 말을 이럴 때 써도 되려나. 다 함께 점심을 먹고 집에 돌아와서 본격적인 생일 축하 순서를 진행했다. 뭐 뻔하디 뻔한 케이크에 초 꽂고 노래 부르고 사진 찍는 거였지만 시윤이는 즐거워했다.
손주들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이른 시간부터 움직이신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무척 피곤해 하셨다. 특히 할아버지들이. 모든 순서를 마치고 잠시 커피를 마시며 쉬는 시간에 스윽 둘러보니 아내, 장인어른, (내) 아빠, 서윤이까지. 차례대로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양쪽 할아버지들은 약속이나 하신 듯
“오늘은 너무 늦게 가면 안 되겠다”
라고 말씀하셨다. 소윤이와 시윤이, 특히 소윤이가 무척 서운한 듯 한참 동안 시무룩했다. 마음이 약해진 (내) 엄마가 ‘조금 더’를 제안하려고 했지만 내가 나서서 칼같이 차단했다. ‘조금’이 조금이 아닌 게 되는 걸 여러 번 경험했으니까. 나야 상관없지만 할아버지들이 너무 피곤해 하셨다. 하긴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고생이다. 3, 4월에 손주들 생일이 몰려 있어서.
“소윤아. 아쉬운 건 아빠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오늘은 어쩔 수가 없어. 할아버지들도 너무너무 피곤하시대. 다음 주나 그다음 주에 할머니 집에 한 번 가자. 알았지? 오늘은 소윤이가 조금 이해해 줘. 서운해하는 건 소윤이도 어쩔 수 없으니까 괜찮지만, 그다음은 이제 소윤이가 결정하는 거야. 이렇게 계속 시무룩하게 있다가 헤어질 건지 아니면 그래도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낼 건지”
편의점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고 헤어지는 것으로 소윤이와 시윤이의 마음을 좀 달랬다.
저녁에는 온라인 모임이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그전에 재우기로 했다. 다 나은 것처럼 보이기는 했어도 어쨌든 아직 불안하기도 했고, 아내와 내가 나름대로 분석하기로는 수면 부족이 큰 원인이었으니 오늘은 최대한 일찍 재웠다.
온라인 모임까지 마치고 나니 피로가 몰려왔다. 아내는 꽃가루 때문인지 눈이 엄청 간지럽다고 했다. 아내가 셋째를 낳고 나서 확실히 바뀐 게 있다. 전에는 없던 알레르기 반응이 많아졌다. 뭔가 몸이 더 예민해진 느낌이랄까. 예민해진 건 아내의 위장 기관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점심을 잘 먹어서 저녁을 따로 안 먹었는데 아내는 이렇게 얘기했다.
“배가 고픈 건 아닌데 출출하네”
술은 먹었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표현에 버금가는 난해한 문장이었다. 물론 나도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아내가 뭔가를 먹자고 하면 흔쾌히 먹을 생각이었다. 아내는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파전을 골랐다. 파전 가게에 전화를 해서 주문하려던 아내가 굉장히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네? 진짜요? 하아. 알겠습니다”
아내의 아쉬워하는 모습은 마치 소윤이가 할머니를 떠나보낼 때의 그것과 비슷했다.
“왜?”
“문 닫았대. 오늘 지방에 가셔야 해서 일찍 닫으셨대”
별생각이 없다가도 한 번 방해를 받으면 괜히 더 욕구가 불타오르기 마련이다. 아내는 또 다른 전 가게에 전화를 했고, 다행히 거기는 문을 닫기 전이었다. 내가 찾으러 갔는데 거기 주인아주머니가 말씀하셨다.
“아이고. 5분만 늦게 전화했어도 못 가지고 갈 뻔했네. 오늘 토요일이라 손님이 많아서 빨리 떨어졌거든. 정리하고 가려고 했는데”
먹놈먹. 먹을 놈은 어떻게든 먹게 된다. 힘든 과정을 거쳐서 그랬을까.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파전은 생각보다 엄청 맛있었다.
아들아, 고마워. 아 왜 너한테 고맙냐고? 응, 할머니가 너 맛있는 거 사 주라며 주신 돈의 일부를 차용했거든. 고맙다. 잘 먹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