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26(월)
퇴근했을 때의 분위기가 평범했다. 좋았다는 말이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빠를 외치며 나에게 달려오고, 서윤이는 멀찍이 서서 ‘악악’ 거리며 나를 보며 웃고. 하루 중 가장 짜릿한 3초를 꼽으라면 이 순간을 꼽을 정도로 환영받는 시간이다. 여기에 취하면 ‘지금 이 순간’이 ‘오늘 하루의 평균’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시윤아. 아빠는 모르시겠지. 우리 시윤이가 낮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내의 말에 뼈 아니 척수가 있었다.
“시윤아. 왜? 오늘 엄마 힘들게 했어?”
시윤이는 특유의 능청맞은 표정과 함께 대답을 회피했다. 아내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꽤 불같은 시간을 보냈으리라. 나중에 아내에게 들어보니 오후의 한복판쯤, 졸음에서 유발되는 만사 짜증의 시간을 지났다고 했다. 시윤이의 짜증과 징징거림은 가히 교과서라고 불릴 만큼 정석적이다. 듣는 이의 인내심을 조금씩 소멸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늦가을의 은행처럼 어디로 가도 걸리고 고약한 악취를 풍기기도 한다. 사랑하는 아들이니까 아니 사랑하는 아들이어도 견디기 힘들 때가 많다. 오늘 아내가 그랬던 것 같다. 참 다행스럽게도(?) 내가 퇴근할 무렵에는 대부분 상황이 정리되고 새로운 국면일 때가 많다. 아내의 부단한 노력이 동반된 결과이기도 하다.
저녁 먹고 내가 씻겨준다고 했더니
“엄마가 씻겨주는 게 좋은데에?”
하면서 익살을 떨었다.
“시윤아. 엄마가 그렇게 좋으면 낮에 말 좀 잘 들어. 엄마 힘들게 하지 말고”
그럼 또 아내가 한마디 거든다.
“그래도 시윤이가 그 뒤로는 말도 잘 듣고 노력했어요”
뭐가 이렇게 오묘한가 싶겠지만, 가족이란 게 그런 것 같다. 정의와 공의만 난무하면 복잡해질 게 없지만 거기에 사랑이 끼어드니, 이건 뭐 이렇게 매력적이고 중독스러운 관계가 또 없다. 어떤 하루를 보냈든 단 하루도, 아내가 아이들 사진을 보지 않고 마무리한 날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게 또 부모 자식, 특히 엄마와 자녀 사이고. 아내가, 출근한 나를 그리워하고 애틋해 하며 내 사진을 막 보고 그러지는 않는다.
아내는 저녁으로 가지밥을 준비했는데 밥솥에 뭔가 문제가 있었는지 아내 생각대로 밥이 되지 않았다. 아내는 굉장히 예민해졌다. 나도 모르게
“여보. 괜찮아. 뭘 그런 걸로 기분이 나빠지고 그래. 그냥 대충 먹으면 되지 뭐. 인상 그만 써”
라고 말할 뻔하다가 번뜩 정신이 들어서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대신, 안아달라고 울어젖히는 서윤이를 안고
“그러게. 밥솥이 어디가 고장 나긴 했나 보다”
정도만 얘기하고, 아내가 나름대로의 대안을 실행하는 걸 기다렸다. 그러고 나서 가지밥이 차려지면 맛있게 먹으면 된다(사실 이건 연기가 필요 없는, 실제 내 먹성이지만). 이런 건 뭐 공식이 있는 건 아니다. 우리 집 얘기가 또 다르고 저 집 얘기가 또 다르니까. 아무튼 오늘은 나도 모르게 정답의 길을 밟았다고 생각한다. 다행이다. 악마가 디테일에 숨어 있는 건 회의와 보고 시간만이 아니다.
시윤이는 저녁 시간 전에 잠깐 장 보러 다녀오는 길에 차에서 낮잠을 잤다고 했다. 소윤이는 거의 잠들 뻔했지만 여느 때처럼 안 잤고. 덕분에 시윤이는 자려고 들어갔다가 두어 번 정도 다시 나왔다. 핑계는 항상 똑같다.
“쉬 마려워서여어”
시윤이의 변의가 진짜였는지 조작이었는지는 소리로 판가름 난다. 진짜일 때는 시원하게, 오래 쏘아대는데 거짓일 때는 꽉 막힌 수도를 틀었을 때처럼 쪼륵 하고 만다. 마지막으로 나왔을 때,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주의를 줬다.
“시윤아. 이제 화장실 핑계로 더 이상 나오지 마. 알았어? 아빠가 잠이 안 오는 건 시윤이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했지? 대신 잠이 안 와도 자려고 노력하고, 장난 안 치려고 노력하는 건 시윤이가 할 수 있다고 했어. 그렇지?”
뭘 알까 싶은 다섯 살도 다 알아듣는다. 내 눈빛, 분위기, 말투로.
그 뒤로는 계속 고요했다. 다 알아듣는 것 같은데 아직도 모르는 척하는 것 같은 막내까지 깨지 않았다. 한 번씩 깨서 울긴 했는데 금방 그치고 다시 조용해졌다. 서윤이에게 섣부른 예측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걸 숱하게 경험했지만, 다시 어리석은 희망을 품어 본다. 때가 그럴 때다. 돌도 지났고, 슬슬 단유도 할 때가 됐고. 무엇보다 도의적으로 이제는 그만할 때가 됐다. 엄마와 아빠에게 깨지 않고 자는 잠의 기분을 다시 느끼게 해 줄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