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27(목)
아내가 오늘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애들을 데리고 나가서 산책을 할 거라고 했다.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하냐는 듯한 나의 걱정에 아내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발버둥 치는 거지 뭐.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고”
숙연하게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는 밤마다 하루를 돌아 보며 ‘내일’을 다짐할 때가 많다. 그럴 때 주된 내용은 ‘내일은 아이들에게 조금 더 잘 해야지’다. 지금도 충분히 잘 하고 있지만, 아내 스스로는 아이들을 조금 더 사랑으로 대하고 싶은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은 충만한데 상황이 충만한 사랑을 갉아먹을 때가 많다. 아무튼 아내는 밤마다 그런 다짐을 하지만 아침마다 무너지는 날도 허다하다.
그 돌파구를 아침 산책에서 찾아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아내의 친한 친구도 아침마다 산책을 하는데 효과(?)가 쏠쏠하다고 했다면서. 이미 어제 애들이랑도 약속을 했다고 했다. 아내가 주로 아침마다 분노를 느끼는, 아이들이 아내의 말을 듣지 않는(주로 하라는 걸 하기 싫다고 버티거나 하기 싫은 티를 팍팍 내는) 지점에서 그러지 않기로. 즉, 아침 산책을 줬으니 기쁨으로 할 일을 기꺼이 하는 태도를 달라는 일종의 거래였다.
“여보. 아마 산책하고 와도 또 똑같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너무 기대하지는 마”
초 치는 것 같아 잠자코 있을까 싶었지만, 그냥 슬쩍 얘기했다.
마침 오늘 아침에 비가 왔다. 아내에게는 힘들지 몰라도 아이들에게는 오히려 더 신날 만한 상황이었다. 우산도 쓰고 장화도 신고. 아내가 보내 준 아침 산책의 모습은 평화와 기쁨 그 자체였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물이 고인 곳을 일부러 팍팍 밟으며 물을 튀겼다. 평소 같았으면
“안 돼. 신발 젖어. 옷도 젖고. 하지 마”
라고 제지했을 텐데 영상을 찍는 아내도 함께 신나게 웃었다. 놀이터에 가서 그네도 타고. 아내의 아침 산책 전략은 꽤 성공적인 듯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주먹밥까지 맛있게 먹었다고 했다.
밤에 퇴근해서 들었는데 아침 산책은 오늘부로 잠정 중단됐다고 했다. 역시나 소윤이와 시윤이의 계약 위반이 사유였다. 아침 산책 후 즐겁고 기쁘게 하기로 한 여러 가지 일을 평소처럼(그렇다고 매번 그러는 건 아니다. 나중에 애들이 보면 오해하겠네. 너네 잘 하고 있었어) 안 즐겁고 안 기쁘게 임했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당분간 산책은 없다고 통보했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슬픔과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오후에는 구름이 걷히고 날이 갰다. 너무 갑자기 다른 날씨가 되었다. 그냥 비가 멈추고 흐리던 게 사라진 정도가 아니라 파랗고 화창한 날씨로 급변했다. 바람이 쐬고 싶었다. 한낱 회사원인 나에게 자유롭게 산책할 권리는 퇴근 후에나 주어진다. 정확히 말하면 퇴근 후에도 온전히 내 의지대로 결정하지는 못한다.
“여보. 애들은 뭐해?”
“그냥 놀고 있지”
“여보는? 괜찮아?”
“나? 어 괜찮아. 왜? 저녁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 먹고 싶은 거 없는데?”
“아, 혹시 그래서 전화했나 했지”
“오늘 저녁 먹고 산책이나 할까?”
“그럴까?”
“여보 괜찮겠어? 안 힘들어?”
“어 괜찮아”
요즘은 퇴근하는 나를 맞아주는 서윤이의 태도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다. 내게 머무는 체류 시간도 훨씬 길어졌다. 나도 그때가 가장 혈기왕성하다. 탈회사의 기쁨과 아이들을 향한 진한 그리움이 복합되어 하루를 보내는 동안 가장 큰 힘이 샘솟는다. 길게 가지는 않는다. 소파에 앉는 순간 사그라든다. 마음은 동일하나 급격한 체력 저하 혹은 일시적 환각 효과의 약화로 금방 피곤이 느껴진다. 오늘도 아주 잠깐 후회했다.
‘아, 괜히 밤 산책 나가자고 했나. 그냥 일찍 재우고 좀 쉴 걸 그랬나’
그래도 일단 뱉은 약속이기도 했고 또 그런 마음 저쪽에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아이들과 걷는 즐거움을 향한 기대도 있었다. 마음을 고쳐 잡고 부지런히 아이들을 씻겼다. 갔다 와서는 손과 발만 씻고 바로 잘 수 있도록. 역시 밤바람 자체는 기분을 좋게 했다. 얼른 하루를 끝내고 조금이라도 쉬고 싶다는 몸의 소리를 잠재울 만큼. 소윤이와 시윤이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네도 타고 유모차에 앉아 있던 서윤이도 아주 잠깐 내려서 걸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지금의 소윤이나 시윤이 정도 때의 기억은 거의 없지만 흐릿하게 남아 있는 순간도 있다. 대부분 밤의 풍경이다. 왜 밤의 기억이 더 많을까 생각해 봤는데 아마 아빠 때문인 것 같다. 퇴근하는 아빠를 마중 나가거나 놀이터에 가서 놀거나 한강 고수부지(그때는 그렇게 불렀다)에 가서 자거나. 아빠와 함께했던 밤의 일탈들이 너무 재밌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나중에 우리 애들도 그런 기억이 많았으면 좋겠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언제나 엄마, 아빠, 누나,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 작지만 작지 않은 바람이다.
“아, 밤 산책은 너무 좋긴 한데. 퇴근이 너무 늦네”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가 시계를 보며 얘기했다. 깊이 공감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니까. 추억을 얻고 쉼을 잃었달까.
그래도 어느새 금요일 전야라는 걸 떠올리며 아내와 서로 위안하며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