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6.09(수)
\출근할 때 아내, 아이들도 함께 집에서 나왔다. 아내와 아이들은 하루 종일 엄청 바쁜 여정이 예정되어 있었다. 아내는 가장 먼저 일어나서 준비를 했다. 난 혼자 나갈 때보다 1시간 정도 더 자기는 했지만 별로 깊이 자지는 못했다. 평소에 일어나던 시간이 지나니 영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먼저 일어났고 서윤이는 계속 잤다. 소윤이와 시윤이 옷 갈아입힐 때도 일부러 방 문을 활짝 열어놨는데 그래도 깨지 않았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서윤이를 안아서 어깨에 걸쳐 올려도 깨지 않았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이 그대로 내 어깨에 기댔다. 괜히 깨서 우는 것보다는 계속 자는 게 나으니까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아빠. 서윤이 깼는데여?”
“아, 그래?”
엘리베이터 거울로 보니 눈을 뜨고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카시트에 앉히자마자 생글생글 웃었다.
“울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안전운전 하세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첫 번째 목적지는 내 사무실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나를 사무실까지 데려다줬다. 운전은 내가 했지만 기꺼이 사무실을 들러줬으니 데려다줬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난 내리고 아내에게 운전대를 넘겼다.
“소윤아, 시윤아. 안녕. 오늘 엄마 말씀 잘 듣고 재밌게 보내. 서윤이도 안녕. 여보도 운전 조심하고”
아내의 다음 목적지는 내 동생네 집이었다. 그다음 약속까지 시간이 좀 남기도 했고 동생네 집이 거기서 그리 멀지 않기도 했다(그래도 30분 정도 거리긴 했지만). 동생이 아기를 낳기 전에는 일을 했기 때문에 낮에 없기도 했고, 또 삶의 접점이 적기도 했다. 집이 멀기도 했고. 이제 ‘육아’라는 공통의 영역이 생긴 덕분에 이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혹은 일부러 만들어서) 만나고 있다. 나보다 아내가 더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다. 아내가 보내준 조카와 서윤이 사진이 또 새로웠다. 아직 100일도 안 된 조카 옆에 누운 서윤이가 엄청 어른스러워 보였다. 아내는 조카와 서윤이가 나란히 누워있는 사진을 보며 나와 내 동생이 보인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서윤이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통달한 사람 같았다. 우리 집에 있을 때는 마냥 막내였는데.
아내와 아이들의 그다음 목적지는 동생네 집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지인의 집에 방문하는 거였는데 가서는 어떻게 지냈는지 자세히 듣지는 못했다. 서윤이가 엄청 힘들게 하지만 않았으면 그런대로 괜찮았을 거다. 일단 집이니까 밖에서 만나는 것보다 훨씬 편하기도 하고. 서윤이가 울어 젖히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문제가 심각해지는 거다. 어땠는지 모르겠다.
그다음 목적지는 다시 내 사무실이었다. 아내는 무려 1시간 30분 정도의 거리를 다시 운전해서 와야 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내 퇴근 시간에 맞춰서 사무실 근처로 왔다. 사무실 근처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나랑 아이들만.
원래 저녁에 약속이 있었다. 나의 전 직장 동기이자 아내와 친구가 된 지인을 만나기로 했다. 나와 아내, 아이들까지 모두 가려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기가 어려울 듯했다.
“여보. 내일 그냥 여보만 가는 게 나을 거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아내에게 그렇게 제안했다. 아내의 대답은 역시나 이거였다.
“그럼 애들은?”
“내가 봐야지”
“여보 혼자? 셋을?”
“어. 이제 괜찮지 뭐”
라고 말은 했는데 조금 아니 많이 떨렸다. 그래도 그렇게 떼(?)로 가서는 이도 저도 안 될 것 같았다.
아내는 나에게 차와 아이들을 인수인계한 뒤, 지하철을 타고 약속 장소에 가기로 했다. 거기서 아내 혼자 저녁도 먹고 친구도 만나기로 했다. 난 사무실 근처 돈까스 가게에서 아이들과 밥을 먹기로 했다. 점심에 먹은 적이 있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돈까스를 좋아하는 소윤이, 시윤이 생각이 계속 났었는데 이번 기회에 한 번 가 보기로 했다.
아내는 혼자 셋을 데리고 식당에 가는 나를 굉장히 걱정했다. 걱정 수준이 아니었다. 깊은 물에 들어가는 겁 없는 어린아이를 보는 느낌이었다. 깊은 물에 들어가면 힘든 게 아니라 죽는 거다. 아내는 서윤이가 괜찮으면 괜찮겠지만, 서윤이가 안 괜찮으면 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눈물이 나올 거라고 했다. 겪어 보지 않은 아픔은 아직 아픔이 아니라서 그런가, 난 호기롭게
“아이 괜찮다니까”
라며 얼른 떠나라고 아내를 떠밀었다. 아내는 결국 우리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혼자 어디 가서 저녁을 먹는 것도 애매하고, 어차피 시간이 남기도 하니 같이 먹겠다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아내가 세 아이의 엄마라는 역할을 잠시 벗는 것도 어색해 하는 듯했다. 하루 종일(진짜 하루 종일) 아이 셋과 붙어 지내다 보니 걔네 없이 어디 가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잘 안 그려진달까. 그런 아내를 보며, 앞으로 더 자주 혼자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덕분에 난 큰 산을 아주 무난하게 넘었다. 식당에 앉자마자 시윤이는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만약 아내가 없었다면 낑낑대며 셋을 데리고 가야 했을 거다. 이미 거기서 체력의 3분의 1이 사라졌을 거고. 난 서윤이, 아내는 소윤이와 시윤이를 맡아서 식사를 했는데 그래도 분주했다. 아내 없이 보내야 하는 시간에서 밥 먹는 게 가장 큰 산이었는데 그걸 아내와 함께 했으니, 그 뒤의 일정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아내는 갔고 나와 아이들은 바로 근처에 있는 카페에 잠시 들렀다. 여기도 예전에 한 번 가 봤는데 여기도 애들 생각이 많이 났다. 쿠키랑 빵 같은 게 다양했다. 다만 모든 빵이나 쿠키는 다 쌀로 만든 거였다. 아내는 쌀로 만든 빵과 쿠키는 취급하지 않는다. 밀가루의 풍미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맛없다는 말이다). 소윤이랑 시윤이는 또 다를지도 모르니까 일단 갔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바로 집에 가지 않고 카페에 들른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아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각각 하나씩 쿠키를 골랐다. 서로 다른 종류의 쿠키였다. 나도 커피를 한 잔 시켰다. 오늘 날씨가 정말 더웠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는 날씨가 딱 오늘이었다. 언니와 오빠가 쿠키를 먹는 동안 서윤이는 치즈를 먹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엄마를 닮아서 쌀로 만든 빵과 쿠키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 맛이 없는 건 아닌데 그냥 많이 먹고 싶지는 않아여”
“아빠. 서윤이가 먹는 치즈가 더 맛있어여”
“시윤아. 너 이거 먹을래?”
“아니. 괜찮아. 누나 먹어”
소윤이와 시윤이가 입에 뭔가 맞지 않을 때 보이는 전형적인 반응들이었다. 나도 먹어봤는데 확실히 밀가루의 퇴폐적인 맛이 아닌 굉장히 선량한 맛이었다. 카페에는 딱 서윤이가 치즈 2장을 먹을 시간 동안만 앉아 있었다. 서윤이가 곧 기준이고 알람이었다.
날이 너무 더워서 서윤이를 안고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흐르는 것만 빼면 별로 힘든 건 없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물론이고 서윤이도 역시나 엄마의 부재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집에 도착해서 씻고 옷 갈아입히는 것도 수월했다.
“소윤아. 서윤이 옷은 어디 있지?”
“서윤이 옷이여? 보통 건조기에 있거나 아니면 여기에”
소윤이가 나보다 서윤이 옷을 더 잘 찾는다. 소윤이가 차지하는 우리 집에서의 업무상 중요도가 이 정도다. 내 입장에서는 아내의 최측근 수행비서 같은 느낌일 때도 많다. 내가 모르는 집안의 현안과 각종 물건의 위치를 더 잘 알고 알려 준다.
“아빠아. 오늘은 책 못 읽어주져어?”
“책? 아니 읽어주지. 골라서 가지고 와”
“오잉? 오늘은 어떻게 읽어줘여어? 늦지 않았어여어?”
“늦었지. 그래도 읽어줄게. 얼른 골라 와”
책 읽고 기도하는 것을 끝으로 모든 일정을 마치고 소등을 했다.
“소윤이, 시윤이 잘 자고. 시윤이는 잠 안 와도 장난치고 시끄럽게 하지 말고. 알았지? 서윤이도 잘 자”
라고 하고 나서 서윤이 옆에 눕지 않고 매트리스 위에 누웠다. 한 번 시도해 봤다. 서윤이가 혹시 혼자 누워서(두어 바퀴 구르면 닿을 거리에 함께 있긴 했지만) 잠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놀랍게도 서윤이는 바로 누워서 잠을 청했다. 이리저리 뒹굴며 손을 빨기는 했지만 벌떡벌떡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매트리스 위로 올라와서 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정말 강아지 같았다. 한 1분 정도 그렇게 누워서 내 손길을 받더니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날 보며 웃어주는 것도 그렇게 기분이 좋은데, 하물며 내 품에 일부러 파묻혀서 애교를 부리는 건 말도 못 한다.
“아빠아. 아빠아”
“어. 왜? 시윤아?”
“너무 추워여”
“아, 그래? 알았어. 아빠가 나가면서 문 닫고 나갈게. 시윤이도 얼른 자. 알았지?”
“네”
아내는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오로지 성인 두 명의 모임이라(이게 웬 당연한 소리인가 싶지만, 아이를 낳고 나서는 온전한 성인으로만 구성된 만남이나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밀도 있게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아, 오늘은 진짜 여보 혼자 가길 잘했다”
“그러게. 여보 덕분에 얘기 잘 하고 왔네”
“앞으로 계속 나가”
“진짜? 괜찮겠어?”
응, 아니. 괜찮안괜찮아. 그 정도야 식은줄알았는데사실은뜨거운죽 먹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