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는 내일부터지만 사실상 오늘이 1일

21.07.02(금)

by 어깨아빠

퇴근하고 바로 아내를 만나 여름휴가(여행)를 시작할 거라 아침에 차를 안 가지고 출근했다. 가까운 곳에 사는 회사 동료의 집 앞까지 택시를 타고 가서 차를 얻어 타고 갔다. 아내는 원래 회사 동료의 집 앞까지만이라도 태워주겠다고(아내가 나를 태워 주려면 당연히 애 셋도 함께 가야 한다) 했다. 피곤과 약간의 병세에 지쳐 쓰려져 잠든 아내는 아침에도 일어나지 못했고, 당연히 깨우지도 않았다. 덕분에 엄청 오랜만에 택시를 탔다.


아내는 무엇보다 머리가 많이 아프다고 했다. 두통은 아내의 가장 큰 고질병이다. 당연히 좀 피곤하거나 신경 쓸 일이 많으면 더 심해지고 오래간다. 아내는 그리 늦지 않은 시간에 일어나서 나에게 카톡을 보냈다.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미안하다면서. 난 가장 먼저 아내의 두통 정도를 물었다.


“머리는 어때?”


다행히 어제보다는 조금 나아졌다고 했다. 기분 나쁜 통증은 여전했지만 심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한 시간쯤 뒤에 아내가 다시 카톡을 보냈다.


“여보. 내 정신력과 체력을 위해 짧게라도 기도해줘요”


아내가 ‘짧게라도 기도’ 좀 해달라고 할 때는 정말 힘든 거다. 다만 애매했다. 이게 애들이 뭔가 힘들게 해서 그런 건지 그저 몸 상태가 안 좋아서 더 힘든 건지.


“심하진 않고. 시윤이의 자잘한 짜증이 계속 있는데 그 와중에 할 일도 많다 보니”


언제든 폭발할 것 같은 상황에서 간신히 이성의 끈은 단단히 붙잡고, 감정의 통문은 어떻게든 열리지 않게 하려는 아내의 의지와 수고가 느껴졌다. 거기에 처치홈스쿨 모임을 위해 1시간 30분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아내가 말한 것처럼 몸과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힘든 상황일지도 몰랐다.


아내는 고단한 일정을 소화하고, 난 들뜬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다시 만났다. 아내가 내 사무실 쪽으로 왔다. 아내가 도착하기 전에 저녁으로 먹을 김밥과 커피를 샀다. 날이 무척 더웠다. 가만히 서 있어도 숨이 턱턱 막혔다. 그래도 조금도 짜증이 나지 않았다. 휴가인이 되었으니까.


장거리 운행을 앞둔 만큼 맛있는 커피를 사고 싶었지만 어디가 맛있는 곳인지 정보가 전혀 없었다. 많이 걷기에는 너무 더운 날씨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으로 검색을 했다. 처음 후보로 둔 카페에 슬쩍 가 봤는데 아주 나이 많으신 어르신 두 분이 계셨다. 음, 노익장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카페의 인테리어나 분위기 등을 조합했을 때 ‘맛있기 어려운 곳’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다른 카페에 들어갔는데 첫 카페처럼 연로하신 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르신’이라 부르기에 어색하지 않은 분이 서 계셨다. 그냥 마시기로 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랑 아이스 라떼 한 잔 주세요”

“네. 7,500원입니다”

“네. 여기요. 아, 아이스 라떼는 조금 진하게 주세요”

“네?”

“라떼는 좀 진하게 달라구요”

“라떼를 진하게…달라는…게…무슨 말이죠?”

“아....네?”

“네?”

“아, 아니에요. 그냥 주세요”


카페인을 섭취하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아내와 아이들을 다시 만났고 난 운전석에 앉았다.


“380km, 4시간”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정보였다. 강남을 거쳐 고속도로를 타야 하기 때문에 얼마나 더 늘어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아내는 매우 지쳐 보였다. 그래도 모든 걸 다 끝냈다는 듯한 안도의 표정이 보이기도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무척 피곤해 보였다.


“소윤아, 시윤아. 우리 엄청 오래가야 하니까 졸리면 참지 말고 자도 돼. 알았지?”


놀랍게도 소윤이는 한 20분 잤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 한숨도 안 자고 무려 400km에 육박하는 장거리 운행을 했는데도 울산에 도착할 때까지 딱 20분 잤다. 그렇다고 엄청 졸리거나 졸려서 짜증을 내는 것도 아니었다.


“피곤하긴 한데 엄청 졸리지는 않아여”


소윤이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진짜 그래 보였다. 시윤이는 반대였다. 푹 자고 일어났으면서도


“아빠아. 저 안 잤는데여어? 잔 적 없어여”


라며 이상한 허세를 부렸다. 허풍인가. 아무튼 자지 않는 한 녀석과 자고도 잤다고 말하지 않는 한 녀석, 그리고 배만 부르면 울지 않고 손가락을 빨며 몇 시간이고 갈 것 같은 한 녀석과 함께 우리에게 숙식을 제공한 Y와 L의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 집의 아이들은 당연히 모두 자고 있었다. 어른들도 어른들이지만 아이들도 서로의 만남을 무척이나 기다렸다. 아내와 나는 신혼시절을 거기서 보냈으니 당연하지만 소윤이와 시윤이도 같은 마음을 품는 게 참 신기했다. 우리 집에 흐르는 울산을 향한 정서랄까.


불청객은 아니지만 아주 늦은 초청객의 소란에 그 집 아이들이 모두 깨서 나왔다. 아이들에게 많은 시간을 주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잠시 서로의 반가움을 나눌 정도의 시간만 주고 다시 잘 채비를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그 집 아이들이 자는 방에 들어가서 함께 자기로 했다. 겁이 많은 시윤이는 이층 침대의 2층에서 자는 게 영 두려운 듯 선뜻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형아(Y와 L의 첫째)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설득(?)으로 간신히 마음을 정하고 2층에 누웠다. 소윤이는 동생(Y와 L의 둘째)과 함께 1층에 누웠다.


벌써 6년째, 그것도 같은 집에서만 여름휴가를 보낸다. 내년에도 오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소 미안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면서 반갑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한 여러 기분을 안고 첫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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