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12(목)
오늘도 아내에게 특별히 힘든 이야기를 전해 듣지는 못했다. 그래도 항상 퇴근하고 들어보면 조금의 파동도 없는 강물처럼 고요했던 날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횟수와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언제나 밀물과 썰물, 파도의 순간이 존재한다. 아마 오늘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아내는 서윤이가 말하는 동영상을 보내줬다. 물론 여전히 부모만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에 가까운 말이지만, 아내와 나는 확실히 느낀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다. ‘아빠’를 부르기 시작한 게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오늘은 ‘아빠한테’를 따라 했다. 새로운 단어도 단어지만 서윤이의 표정도 달라졌다. 뭔가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단어에 어울리는 표정을 짓는 느낌이랄까. 사무실에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소리를 엄청 작게 해 놓고 보거나 아예 소리가 안 나게 하고 보는데, 오늘은 이어폰을 꽂고 봤다.
아내는 중고거래 때문에 오후에 잠시 나갔다 온다고 했다. 그게 아내와 아이들의 유일한 외출이었다.
어제 애들을 아예 못 봐서 그런지 오늘은 유독 보고 싶었다. 빨리 퇴근해서 애들이랑 놀고 싶었다. 막상 퇴근하면 천근만근 내려앉는 피곤 때문에 마음처럼 못하는 날도 많았지만, 아무튼 오늘도 의지를 다졌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내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내릴 때부터 이미 베란다에 나와 나를 보고 있었다. 소윤이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는 10층 위에서도 선명하게 내리 꽂혔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난 손을 흔드는 것으로 화답했다.
“아빠. 여기 서윤이도 있어여”
서윤이도 언니와 오빠를 따라서 나왔나 보다.
집에 올라갔을 때는, 8자리의 비밀번호 중 2자리까지 눌렀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가 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씩 차례대로 안아주고 가방 내려놓고 손 씻고 바로 다시 출근. 소윤이와 시윤이가 뭔가 얘기하고 싶어 하면 최대한 열심히 들어주고 나한테 매달려 놀고 싶어 하면 최대한 내어주고 그랬다. 업어주기도 하고 등에 태우고 기어 다니기도 하고 그랬다. 서윤이하고는 그 틈새를 이용해 놀았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 나니 급격하게 피로가 쏟아졌다. 잠깐 소파에 앉았지만 금방 일어났다.
‘지금 설거지를 하지 않으면 이따 해야 돼. 지금 하자. 지금 하자’
설거지가 많지는 않았다. 저녁 먹을 때 쓴 그릇만 씻으면 됐다. 아내는 소윤이와 시윤이를 한 명씩 데리고 가서 샤워를 시켰다. 그때도 난 서윤이랑 놀았다. 서윤이는 내가 좀 격렬하게 들이대도 받아주는 것 같아서 좋다. 나한테 잘 오고 강아지처럼 갑자기 앞에 엎드리는 것도 좋고. 소윤이만 해도 이제는 내가 원하는 대로 격렬하게(?) 하지 못한다. 뽀뽀를 해도 굉장히 정갈하게, 포옹하는 것도 차분하게 해야 한다. 소윤이는 너무 막 그 부담스럽게 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한다. 시윤이는 약간 싫어하는 듯하지만 또 소윤이처럼 진심으로 싫어하지는 않고. 아무튼 서윤이만 아직 아무 장벽이 없다.
시윤이는 여전히 엄지손가락을 빤다. 자꾸 숨어서 몰래 빨길래, 그러지 말고 차라리 엄마, 아빠 보는 데서 빨고 몰래 하지는 말라고 했더니 정말 대놓고 빤다. 뱉은 말이 있으니 아내나 나도 그냥 지켜봐야 한다. 덕분에 시윤이의 한 손은 항상 따봉 자세고, 한 손에는 머리카락을 쥐고 있다. 손을 그냥 빠는 게 아니라 시윤이가 독자 개발한 매커니즘에 따라 머리카락 끝으로 코 끝을 간지럽히면서 빤다.
“머리카락을 보면 손가락이 빨고 싶더라여어”
라는 말을 시윤이가 자주 한다. 진짜 머리카락 때문인지 아닌지는 머리카락을 모두 없애 봐야 확인이 가능한데, 머리카락을 아예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아무리 부지런하게 테이프를 이용해 머리카락을 매 순간 치우는 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시윤이는 머리카락 찾는 능력이 탁월하다.
“시윤아. 아빠 궁금한 게 있어”
“뭐여어?”
“머리카락으로 코 끝에 그렇게 하면 안 간지러워?”
“네”
“아빠가 한 번 해 볼게”
시윤이한테 하기 전에 내가 내 스스로 코 끝을 간지럽혔는데,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서윤이도,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소윤이는 조금 잘 참았고. 시윤이는 참기는커녕 즐겼다. 참 독특한 습관이다.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기는 걸 보면, 시윤이가 너무 시도 때도 없이 빠는 걸 보면 고쳐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냥 두기로 했다. 뭐 일단 양성화는 해 놨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