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04(토)
오늘도 아내는 치과에 가야 했지만 오늘은 몰래 미행하고 그런 거 없었다. 아내의 치과 진료가 끝나면 처가댁에 가야 했기 때문에 아침부터 함께 움직였다. 아내가 치과 진료를 받는 동안 나는 세 아이를 데리고 치과 근처의 올리브영으로 갔다. 장모님의 생신 선물을 사기 위해서였다. 내가 사는 건 아니었고 소윤이와 시윤이가 사는 선물이었다.
소윤이는 그동안 모아둔 용돈으로 사는 거였고, 받는 용돈이 없는 시윤이는 ‘특별 용돈’이라는 이름으로 시윤이가 사는 거였다(일종의 무이자 무상환 결제대행이랄까).
애들이 사는 거라고 그냥 아무거나 사지는 않았다. 아내의 조언을 참고해 그래도 할머니가 쓰실 만한 걸 고르기로 했다. 핸드크림과 마스크팩이 후보였다. 일단 핸드크림을 골랐다. 아주 작은, 가장 작은 크기의 핸드크림이었고 그건 소윤이가 사는 거였다. 다음은 마스크팩을 골랐다.
계산대 앞에 가서 소윤이는 자기 지갑을 꺼내 돈을 내고 거스름돈을 받았다. 시윤이에게도 ‘자기가 산 선물’이라는 걸 느끼게 해 주기 위해서 현금을 주려고 했는데 하나도 없었다. 이미 계산대 앞에 섰기 때문에 더 고민하고 뭐하고 할 겨를 없이 직원분에게 카드를 건넸다.
“아빠아. 저는 왜 제가 계산 안 해여어?”
“아, 이거 시윤이가 사는 거야. 아빠가 계산만 하고 시윤이가 사는 할머니 선물이야 이게”
다소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시윤이에게, 지금 산 선물이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도 안 해줬다. 당시에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지나고 나니 시윤이에게 미안하네. 미안할 일은 아니지만 미안하네.
“아빠. 시윤이 선물이 제가 산 것보다 더 비싸네?”
“아, 그런가? 그러네. 그럼 이걸 소윤이가 산 걸로 할까?”
“아니에여”
좀 더 차분히 생각을 했으면 좋았을걸, 별로 그럴 만한 상황도 아니었는데 괜히 분주했다. 서윤이도 유모차에 얌전히 앉아서 언니와 오빠의 행동을 잘 구경해 줬는데.
어쨌든 계산을 마치고 나니 조금 막막했다. 아내의 진료가 끝날 때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지 캄캄했다. 일단 밖으로 나가서 길을 건너려는데 반대쪽에 아내가 보였다. 정말 반가웠다. 오늘은 지난주에 만들어 놓은 가짜 치아(?)를 끼우기만 하면 되는 거라 순식간에 끝났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막막함이 든든함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모든 일정이 생각보다 너무 일찍 끝났다. 처가에 가기 전에 점심을 먹어야 했다. 점심을 먹기에는 사실 좀 이른 시간이었다. 아내와 나는 아침을 걸렀기 때문에 상관이 없었지만 아이들은 아침을 먹은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그렇게 배가 고플 것 같지 않았다.
“소윤아, 시윤아. 배고파?”
“음, 배가 고프지는 않은데 엄청 배부르지도 않아여”
어느 정도 상태인지 딱 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점심을 거를 수도 없고 더 버티며 할 것도, 할 곳도 없었기 때문에 일단 먹기로 했다. 아기의자가 없고 바닥에 앉아서 먹어야 하는 곳이라 서윤이의 태도에 따라 식사의 질이 크게 좌우될 만한 곳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며 각오를 다지려고 했지만 자꾸 두려웠다. 아무런 통제 장치도 없이 그야말로 맨몸으로 바닥에 앉혀 놓고 밥을 먹여야 하는 곳이라 더 그랬다.
다행히 서윤이는 짜증도 내지 않고 돌아다니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서 밥을 잘 먹어줬다. 자주 일어나서 뜨거운 음식과 매운 음식에 손을 뻗기는 했지만, 그 정도야 얼마든지 감수할 만한 일이었다. 잔뜩 긴장한 것에 비하면 싱거울 정도로. 소윤이와 시윤이도 배가 하나도 안 고픈 것치고는 맛있게 잘 먹었다.
장모님의 환갑을 기념해 모이는 거였다. 코로나 때문에 유야무야 지나가게 되는 분위기 속에 최소한의 아쉬움이라도 달래기 위한 자리였다. 미리 할머니에게 드릴 편지를 쓰지 못한 소윤이는 할머니가 오후에 약속이 있어서 나가시면 그때 편지를 쓰려고 했다.
“소윤아. 할머니, 할아버지 오늘 안 나가도 돼. 그게 다음 주였는데 착각했네”
“할머니 아무 데도 안 나가여? 할머니 혼자라도 나갔다 와여”
진귀한 광경이었다. 소윤이가 할머니를 나가라고 하다니. 편지를 못 쓸까 봐 초조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장모님은 장을 보러 나가셨다. 시윤이는 할머니를 따라서 나갔다. 그 사이 소윤이는 엄마의 도움을 받아 할머니에게 드릴 편지를 무사히 썼다. 장모님은 과일을 잔뜩 사 오셨다.
서윤이는 이제 ‘가족’의 범위를 완전히 이해한 듯 보였다. 할아버지에게도 서슴없이 갈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품에 안겨서도 많은 걸 했다. 낯가림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똥도 많이 쌌다. 거기서만 무려 세 번을 쌌다. 작은 고추가 맵고, 작은 똥도 고약하다. 쌀 때마다 양은 미미했는데 냄새는 어찌나 나는지(사실 세 번 모두 장모님이 씻겨 주셨다). 장모님, 장인어른이랑 놀이터에 다녀오기도 했고, 혼자 집에 남기도 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완전한 자기 편, 안전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게 분명했다.
밥도 먹고 생신 축하도 하고 손주들의 선물도 전해드렸다.
“우와, 시윤아. 이건 뭐야?”
“….”
시윤이에게 그게 뭔지 설명도 안 했으니 시윤이도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시윤이에게 몸짓과 손짓으로 얼굴에 붙이는 거라고 설명을 해 줬다. 시윤이는 멋쩍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시윤이에게 또 미안했다. 시윤이의 요즘 주된 정서 중에 이런 게 있다.
‘누나는 다 할 수 있는 것 같은데 자기는 안 되는 게 많다’
때로는 괜한 심술로, 때로는 조용한 침묵으로, 때로는 부러운 표정으로 시윤이의 감정이 드러난다. 모든 순간에 시윤이의 그 부족함을 위로해 줄 필요는 없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자기도 얻게 될 능력(?)이 대부분이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시간의 흐름과 그 속에 쌓아야 하는 노력이 있어야만 능숙해진다는 걸 배워야 할 필요도 있다. 다만 어쩔 수 없는 서운하고 아쉬운 감정들은 잘 살펴줘야 한다. 시윤이는 요즘 그런 시기를 보내고 있다. 어쩌면 시윤이의 인생 내내 그럴지도 모르고. 그래서 요즘은 집에 들어올 때 그렇게 자기가 비밀번호를 누르려고 한다. 누나의 전유물이었던 8자리 숫자를, 이제는 자기도 누를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은가 보다.
엄청 늦은 시간까지 있다가 왔다. 아내는 애초에 갈아입힐 옷(잠옷)을 준비해 갔고 세 녀석 모두 씻겨서 나왔다. 시윤이와 서윤이는 물론이고 소윤이도 오는 길에 잠들었다. 아내의 경험 통계에 근거하면, 시윤이가 가장 잠에서 안 깬다고 했다. 일단 내가 시윤이를 안고 올라가서 방에 눕혔다. 다시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서 소윤이는 내가 안고, 서윤이는 아내가 안고 유모차에는 짐을 싣고 올라오려고 했는데 소윤이는 깨서 아내 옆에 서 있었다.
“어, 소윤이는 깼네? 안 졸려?”
“졸려여”
말은 졸리다고 했지만 그냥 멀쩡한 정신이었다. 소윤이답게.
“아빠. 안아주세여”
소윤이도 똑같이 방까지 안고 가서 자리에 눕혀줬다.
“아빠. 안 힘들어여?”
“힘들지”
“근데 왜 여기까지 안고 왔어여?”
“그냥. 소윤이 오랜만에 안아준 거지. 그래도 아빠가 아직까지 소윤이 안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치?”
“네”
소윤아, 아직 10층 정도는 거뜬하네. 아빠의 코어에 문제만 생기지 않으면 아직 괜찮아. 걱정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