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열심히, 그래서 행복한

21.10.07(목)

by 어깨아빠

퇴근해서 문을 열자마자 언제나처럼 세 녀석이 나를 반겼다. 서윤이는 조금 달랐다. 여태껏 본 것 중에 가장 반가움이 넘쳤다. 아빠를 보고 흥을 주체하지 못해서 춤을 추다 못해 몸을 부르르 떠는 것처럼 좋아했다. 입으로는 계속 깍깍거리며 까마귀 소리를 냈다. 그 장면을 찍지 못한 게 한스러웠다. 어제 건조기 고치러 오신 수리 기사님을 보고는 집이 떠나가라 오열했다는 걸 보면, 아빠를 분별해서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뿌듯하기 그지없다.


새로 산 프린터가 배송되어서 현관에 놓여 있었다. 아내의 저녁 준비 추이를 보니 아직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아서 상자를 뜯을까 하다가 말았다.


“아, 서윤이 때문에 안 되겠다. 이따 애들 들어가면 하든가 해야지”


프린터 설치야 간단한 일이지만 서윤이의 참견을 걷어내며 하려면 너무 성가실 것 같았다.


“여보. 그럼 상자만이라도 뜯어 줄 수 있나요? 소윤이랑 시윤이가 너무 보고 싶다고 했거든요”


이런 일(뭔가 새로운 일, 뭔가 설치하고 조립하는 일)에 매우 관심이 많은 소윤이가 프린터 설치하는 걸 꼭 보고 싶다고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를 위해서 서윤이의 방해를 감내하고 상자를 뜯기로 했다.


“자, 서윤이도 여기 언니 옆에 앉아”


서윤이는 생각보다 말을 잘 들었다. 한 번씩 만지면 안 되는 것들에 손을 뻗으며 나를 보고 씨익 웃기도 했지만, 대체로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고 오지 말라고 하면 안 왔다.


프린터는 무사히 설치했는데 노트북이 말썽이었다. 인터넷이 연결이 안 돼서 이렇게 저렇게 해 보려고 했는데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해결도 안 될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느라 저녁 먹고 나서 애들하고 제대로 시간도 못 보냈다.


그 와중에 시윤이가 평소보다 차분한 게 느껴졌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장난도 안 치고 까불거리지도 않고. 아주 작은 잘못을 가볍게 지적했더니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이 촉촉해지기도 했다. 애들 재우고 아내에게 들어 보니 기분이 안 좋았던 게 맞는다고 했다. 내가 퇴근하기 직전에 장을 보러 나갔다가 잠깐 놀이터에서 놀았는데, 그때 기분이 틀어지고 울기도 했다고 했다.


상황을 들어 보니 시윤이가 잘 한 건 아니었다. 억지에 가까운 고집을 부린 게 시윤이었다. 아마 나도 그 자리에서 직접 시윤이를 봤으면 안 그랬을지 모르지만, 아내에게 듣기만 하니 측은한 마음이 생겼다. 낮에는 아내가 시윤이의 진단 평가(말 그대로 시윤이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기 위한 과정)를 했는데, 시윤이는 자기가 ‘모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했다. ‘뭐든 누나가 하는 만큼 하고 싶은’ 시윤이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었나 보다. 아내의 표현에 의하면, 시윤이도 알긴 알았는데 인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불쌍한 녀석.


날로 존재감을 뽐내는 서윤이를 바라보는 엄마와 아빠의 눈빛에 혹여 마음이 상한 건 아닌지 괜히 걱정도 되고. 내일 퇴근하면 일단 시윤이에게 가장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이런 일련의 일(시윤이와 관련한, 특히 낮에 공부할 때의 일)을 열심히 설명했는데, 내가 너무 영혼 없이 대답해서 지적당했다. 그래도 다 듣고 있긴 했는데.


아내는 애들을 재우고 나와서 열심히 영어 공부를 했다. 아이들에게 가르칠 영어 발음을 녹음해 가며 연습했다. 한참 동안. 마치 어학원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낮에 집에서 나가기 전에 서윤이 옷을 모두 소윤이가 입혔다고 했다. 기저귀부터 겉옷까지 몽땅.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소윤이도 영어 공부할 때는 잘 안 되는 발음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하다고 했고.


내가 열심히 일하고 땀 흘리는 동안 아내와 아이들도 나만큼이나 애를 쓰고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언젠가 정말 그리울 거다. 쉽고 편하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모두 함께 할 수 있었던 이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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