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26(화)
아침부터 비염이 엄청 심했다. 사무실에 가서 차가운 커피를 마신 게 불을 붙인 듯했다. 오전 내내 재채기를 하고 콧물을 줄줄 흘렸다. 점심시간에 약국에 가서 약을 하나 샀다.
“이거 말고 더 센 걸로 주세요”
비염은 조금 나아졌지만 엄청난 몽롱함이 밀려왔다. 하루 종일 제대로 일을 못할 정도로. 코도 막히고 가슴도 답답해서 오늘 저녁에는 늦더라도 나갔다 오고 싶었다. 저녁에 목장 모임이 있는 게 걸렸다. 오늘 나누게 될 성경 말씀을 보니 더 갈등이 됐다. 내 마음과 너무 다른 말씀이었다. 부정한 내 마음을 개량하기 위해 일부러라도 참여해야 할지, 오늘만큼은 자유롭게 감정을 부풀릴지. 퇴근할 때까지 고민했다.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목자 집사님에게 카톡을 보냈다. 오늘은 참석이 어렵겠다고.
아내와 아이들은 오후에 처치홈스쿨 모임이 있어서 무척 바빴다. 그랬을 거다. 모임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엄청 바빴을 거다. 애들은 바쁠 게 없어도 아내는 정신이 없었을 거다.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바로 저녁 준비를 시작했을 거다.
문을 여니 세 녀석이 쪼르르 문 앞으로 달려왔다. 허리를 숙여 소윤이를 안아주는데 소윤이가 말했다.
“아빠. 제대로 안아주세여”
“그럴까?”
한 명씩 번쩍 들어 올려서 서로의 얼굴이 같은 높이에 오도록 안았다.
가장 가벼운 서윤이는 이리저리 흔들고 떨어뜨리면서 안아줬다. 그걸 본 소윤이와 시윤이는 자기도 그렇게 해 달라고 요청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힘이 들어서가 아니라 진짜 불가능하다. 대신 내가 바닥에 눕고 얘네가 위에 올라타는 건 아직 견딜 만하다.
“아빠. 힘들어여?”
“아니, 괜찮아. 안 힘들어”
오늘따라 소윤이와 눈이 많이 마주쳤다. 그만큼 소윤이가 날 유심히 본 건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일부러 더 웃었다. 울면 삼류, 참으면 이류, 웃으면 일류라고 했던가. 난 일류 아빠가 될 거다.
저녁은 카레였다. 과연 서윤이가 이걸 얌전히, 많이 안 묻히고 먹는 게 가능할까 싶었다. 처음에는 먹여 주려고 했는데 그게 싫다면서 바득바득 울어댔다. 포기하고 서윤이에게 식탁을 내어줬다. 숟가락은 오른손에 쥐고, 왼손으로 밥과 카레를 집어먹기 시작했다. 제대로 인도식이구나. 그래도 염려(?)한 것만큼 개차 아니 난장판을 만들지는 않았다.
저녁을 먹고 애들을 씻길 때, 이때가 항상 고비다. 일종의 사점(death point)이랄까. 아내도 나만큼이나 힘들고 피곤해 보였다. 얼굴에 웃음기가 하나도 없고 꼭 누구와 싸운 사람처럼 표정이 어두웠다. 이걸 생각만 했어야 했는데 굳이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기분 안 좋은 사람 같다고.
아이들과 방에 들어간 아내가 카톡을 보냈다.
“여보 오늘은 내가 정말 서운하네”
답장은 하지 않았다. 아내 말대로 서운할 만했다. 내가 잘한 것도 없었다. 아니 잘못한 거지.
가방을 챙겨서 집에서 나왔다. 이놈의 코로나 때문에 10시까지만 카페에 있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갔다. 일기 말고 다른 글을 쓰고 싶어서 끄적거렸는데 두 단락도 채 못 쓰고 10시가 됐다. 집으로 가지 않고 차로 갔다. 노트북을 펴고 마저 글을 썼다. 일기도 쓰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동네도 한 바퀴 돌았다. 밤공기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내가 딱 좋아하는 정도의 쌀쌀함이었다.
집은 내가 나갈 때와 똑같은 상태였다. 불도 그대로 꺼져 있었다. 아마 아내는 다시 거실로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씻고 방으로 들어갔다. 다들 바닥에서 자고 있었다. 매트리스 끝에 붙어서 누우니 다행히 서윤이가 닿았다. 욕심내지 않고 손과 발만 만지면 될 것을 괜히 볼을 쓰다듬어서 멀리 도망갔다.
내일 축구를 하게 돼서 여러모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